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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Jun 02. 2020

남편이 임신 우울증에 걸렸어요.



나이가 든다는 건
돌아볼 추억이 많아진다는 것.


슬의 속 산부인과 의사인 석형이 산모들을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나의 임신 시절이 떠올랐다.




예고 없이 찾아왔던 첫째와 달리 둘째는 계획임신을 했다. 이번에 낳지 않으면 둘째는 없다는 엄포(?)를 놓은 후 낳을 계절을 고민했다. 태어나고 두 달 만에 2살이 되는 첫째를 보며 둘째는 봄에 낳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임신 시기는 여름으로 정했다. 보통은 임신 시기를 정한다고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내 생리주기가 지나치게 규칙적인 탓에 우리는 가능했다. 그렇게 둘째를 임신하고 심한 입덧이 찾아왔다. 첫째 때는 그저 속이 좀 거북한 정도였는데 둘째는 세상 모든 음식의 냄새가 역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줄어들고 그나마 억지로 먹은 음식은 다 토해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됐던 첫 임신에 비해 먹이고 입히고 놀아줘야 되는 첫째가 있는 두 번째 임신은 더 힘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임신을 하면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고 한다. 한겨울에 나오지도 않는 딸기나 복숭아를 찾거나(지금은 겨울이 제철인 딸기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지만 20여 년 전에는 그랬다) 가게가 문 닫은 새벽에 그것도 먼 곳 음식을 콕 찍어 먹고 싶다고 해 남편들의 애를 먹인다는 이야기가 드라마 속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에서 더 신기한 건 그렇게 남편이 고생해 사온 먹거리를 보면 먹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어떤 드라마에서는 먹고 싶은 것이 없어도 일부러 남편에게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주문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나는 첫째의 입덧이 수월했던 덕분에 그런 드라마 속 이야기가 말 그래도 드라마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둘째를 임신하고 그런 신기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먹고 싶던 음식이 눈앞에 나타나면 갑자기 먹기 싫어지는 마법 같은 일이, 먹기만 하면 토하는 진짜 입덧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던 임신 초기였다. 갑자기 감자탕이 너무 먹고 싶었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음식은 많았지만 먹고 싶다 하고 안 먹으면 인상을 쓰는 남편 때문에 대부분은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 한 번은 지나가는 말로 감자탕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날따라 남편이 나가서 먹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근처 감자탕 거리의 늘 먹던 30년 전통 감자탕집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감자탕이 나와 가스불이 점화되는 순간 가스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맛있어 보이던 감자탕이었는데 한 숟가락도 넘기기가 힘들었다. 먹으면 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남편의 반응이 두려워 억지로 몇 숟가락 떠 넘겼다. 이렇게 한순간에 입맛이 사라질 수 있다니..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에겐 참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먹고 싶다고 했잖아. 많이 먹어.”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남편은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챈 듯했다. 먹는 둥 마는 둥 감자탕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얼마 먹지도 않은 감자탕을 다 토해냈다. 해 본 사람만 아는 매운 음식 먹고 토하기.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먹고 토할 때보다 목구멍이 타 들어가는 느낌 때문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고 토하는 것은 더 힘들다. 첫째가 걱정하며 고사리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는 동안 남편은 방에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줬는데 왜 다 토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한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맞은 놈은 기억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남편은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사건은 연애할 때 테크노마트 식당가에서 먹었던 쟁반국수 때문에 일어났다. 나는 결혼 전에는 면 종류를 거의 먹지 않았다. 특히 국수는 몹시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날은 뜬금없이 쟁반국수가 먹고 싶은 거다. 그것도 콕 집어 집에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테크노마트 식당가 쟁반국수가..

 

“나, 갑자기 우리 데이트할 때 먹었던 테크노마트 쟁반국수가 먹고 싶다?”

“갑자기?”

“응. 나 국수 안 좋아하는데, 그거 그렇게 맛있게 먹은 기억도 없는데 갑자기 너무 먹고 싶네.”

“그걸 지금 어떻게 먹어.”


최대한 애교스럽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남편의 퉁명스러운 대답뿐. ‘뭐가 문젠데. 주말이고 낮이고 식당이 문을 닫을 시간도 아닌데 사 오는 건 그렇다 치고 같이 가서 먹고 오자 하면 어디가 덧나냐? 아무리 내가 낳자고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비협조적일 수가 있는 거야.’ 속으로만 속사포처럼 불만을 쏟아낸 후 서러움에 근처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엄마가 이야기를 들으시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비빔국수를 한 그릇 가득 말아주셨다. 눈물을 삼키며 퉁퉁 불은 국수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너무 맛있었다고 해야 감동적인 드라마가 완성되는데 하필 그날따라 엄마는 국수 삶는 시간 조절에 실패, 그릇 가득한 국수가 퉁퉁 불어 한 덩어리로 사이좋게 따라 올라왔다. 엄청 맛없는 국수여서 그런지 더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남편은 원치 않는, 마치 나만 원하는 듯한 둘째를 낳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인가 술 한잔 끝이 그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신 그거 알아? 부인이 임신했을 때 남편이 못해준 건 평생 간대.”

“그래? 난 잘해줬는데.. 당신은 그런 거 없지?”

‘헐.. 지금 이걸 말이라고.’

“당신 채원이 임신했을 때 감자탕 먹고 토한다고 짜증내고 쟁반국수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 어떻게 먹으러 가냐고 화냈잖아. 기억 안 나? 당신처럼 거저 아빠 된 사람은 없을 거다.”

조용히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남편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는 내가 임신 우울증이 와서 그랬던 것 같아. 당신이 둘째 임신하고 나니까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더라고.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애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나.”

‘와~~~ 신선한 핑계다. 이 남자 나이 들더니 점점 뻔뻔해진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다곤 하더라. 사이좋은 부부는 부인이 입덧하면 남편도 함께 상상 입덧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근데..”

.

.

.

.

.

.

“왜 힘든 입덧은 안 하고 임산부도 안 걸린 임신 우울증을 겪었대? 기왕이면 나 대신 입덧을 하지.”

“ㅋㅋㅋ”

“암튼 이건 평생 가는 거니까 앞으로 알아서 잘해.”



나는 가끔 남편과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투정 부릴 수 있는 요즘의 일상이 좋다. ‘당신 고생 많았어.’라고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요즘의 일상이 참 좋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이만하면 잘 고쳐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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