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첫날.
돌아갈 곳이 있는 휴식은 더 달콤하다. 오늘부터 약 한 달간 무급 휴가가 시작되었다. 일터가 학교라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유급이건 무급이건 방학이라는 긴 휴가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식탁에 앉아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는 짧은 시간이 참 평화롭다.
우리 집은 정남향 집이지만 아파트 앞동에 가려 햇살이 거실에 들어오는 시간은 짧은 편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한 햇빛이지만 식물을 키우기에는 아쉽다. 나는 우리 집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을 좋아한다. 확장형 거실에 들어온 햇살을 받은 식물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그 순간을 즐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터에 있거나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혹은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이틀 전부터 오른쪽 얼굴이 아프다는 딸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작년 베체트병 증상으로 병원 검진을 다녀온 뒤로 아이가 조금만 아프다 하면 온 신경이 곤두선다. 자가면역질환은 어느 순간, 어떤 원인이 기폭제가 되어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진료를 받아온 소아과 선생님이 아이의 증상을 들으시더니 우리보다 더 걱정을 하셨다. 당신 생각엔 아무래도 면역질환 초기인 것 같은데 검사를 해도 너무 초기라 병명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다. 대한민국 고 3은 안 아프면 이상하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달고 살아야 하니 대한민국 고 3은 늘 아프다. 대부분은 그 시기가 지나면 저절로 낫지만 딸아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막연하게 알고 있다. 터지면 대형사고다.
진통제를 처방하시며 의사 선생님이 위로하듯 말씀하셨다.
“아프면 무조건 쉬어야 해. 참고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고생한다. 하루 확실하게 쉬는 게 더 나아. 그나저나 너, 올해 몇 번 더 병원 와야겠네.”
아이가 아프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언젠가, 한 달에 며칠씩 다른 이의 얼굴로 변하는 이상한 병에 걸린 주인공이 나오는 ‘뷰티 인사이드’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 엄마가 아파하다 잠든 딸 옆에서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아프지 마. 꼭 내가 잘못 산 벌을 네가 받는 것 같아서 속상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딸아이가 아플 때마다 내 마음이 꼭 그러했다. 아슬아슬 병과의 줄타기를 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아이가 대신 받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면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남편 때도 그랬듯 지금 우리의 상황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들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난 좋게 말하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가 빠른 스타일이랄까? ^^
병원도 외출이라고 나온 김에 운동삼아 도서관까지 걸어가 책을 빌려왔다. 집에 오자마자 새로 산 수면잠옷으로 갈아입고 새로 산 아이패드로 수학 공부를 하는 딸과 식탁에 앉아 하루 종일 보석 십자수를 했다.(방학 첫날이라 나도 원대한 목표가 있었는데 첫날부터 망했다.) 공부할 때 엄마가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며 딸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나 수능 볼 때 엄마랑 같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들어가지 뭐. 근데 엄마가 니 앞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
"선택과목이 같으면 되지 않을까? 아.. 학교가 다르려나?"
"엄마 사진 들고 들어가."
"난 아무래도 캥거루족이 될 수뿐이 없는 운명인 것 같아."
"왜?"
"너무 곱게 자랐어."
그리곤 내가 할 말까지 다 했다.
"대체 엄만 뭘 낳은거야?"
반려병을 키우는 캥거루족을 낳았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