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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May 02. 2021

혼자 서는 아이를 바라보며


금요일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출동 떴음

한강에서 실종된 대학생 찾으러.

나는 근무라 못 나감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하고 있는 아들이 하는 일은 경찰서 경비 업무와 실종자 수색 지원 업무다. 의경은 2023년까지 폐지 수순을 밟고 있기 때문에 인원이 많지 않음에도 그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급할 때면 출동이라는 것을 한다. 얼마 전 내 생일에는 전화 도중 뒤에서 우당탕 우당탕 부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출동”이라는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가 끊긴 적도 있었다. 나중에 어떨 때 출동을 하냐 물어보니 자살 의심자가 있다거나 실종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대부분은 찾지 못하거나 오신고인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아들의 첫 출동은 실종 신고된 치매 노인을 찾는 일이었다. 몇 시간을 찾다 못 찾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에 계셨다는 조금 황당한 사건이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좀 잘 찾아보고 신고하지’라는 원망(?) 어린 생각도 했었다. 애들 고생하는데.. ^^


얼마 뒤 핸드폰 속 네이버 기사를 읽던 차, 다시 아들의 카톡이 왔다.


아들 죽었다네.

남편 헐

아들 한강공원인가 어딘가에 떠올랐다고 함.

 방금 엄마도 기사 봤어.

아들 선임들 방금 들어옴.

 그 부모 어떡하냐.


아들과 동갑내기라 더 맘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들도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 종종 있었다. 자취를 하면서는 몇 시에 들어가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잘 지내겠거니.’ ‘잘하고 있겠거니’ 믿을 수뿐이 없었다. 아마 그 아이 부모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술 많이 마시지 마라’라는 말로 걱정을 묻어두었겠지.



남편 너도 술 먹고 조심해.

 그니까 엄마도 그 생각나더구먼..

아들 난 그 정도로 안 마셩.


잔소리 듣기 귀찮다는 듯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모티콘 하나 안 달았는데, 딱히 부정적인 단어도 없었는데 한 줄의 짧은 글에서 감정이 느껴지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아들이 처음 집을 떠나던 해, 참 많이 불안했었다. 이미 법적으로 성인이었음에도 과연 집 떠나 그 먼 곳에서 혼자 잘 지낼지, 떠나는 아들은 신이 났는데 보내는 나는 맘이 무거워 자꾸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했었다.

“밤늦게 다니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전화 자주 하고.. 나갈 땐 문단속 잘하고 가스 꼭 잠그고.. 빨래는 바로바로 널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이 자취를 시작한 첫 해는 혼돈의 학교 생활을 하는 딸을 다독이느라 아들의 빈자리를 느낄 틈도 없이 지나갔다.


다정한 아들은 매일 학교 가기 전이나 집에 들어가서 전화를 걸어 나를 안심시켰다. 가끔 술자리에 갈 때는 미리 전화로 통보를 했다. 연락이 안 될 거라고. 하지만 이런 아들의 다정함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한 아들의 선의의 거짓말들을. 아들은 걱정하는 나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고 나는 그런 아들의 마음을 이해해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어디까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언제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일까?


어미새는 새끼새가 날갯짓을 배워 하늘을 날 수 있으면 더 이상 새끼새와 함께 하지 않는다. 비단 새뿐만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새끼가 독립할 시기가 되면 매정하게 떠난다. 그렇게 독립된 개체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만이 마지막 순간까지 부모자식간의 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학자가 아닌 나는 그 위대함이 없었다면 인간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헤어질 시기가 정해져 있다면 어쩌면 함께 하는 순간에 더 많이 애정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돌아서서는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모호한 마음과 부정확한 시기에 엇갈리는 마음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니까.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날 시기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반면 부모는 그 시기를 자꾸 부정하려고 한다. 나는 요즘 아이의 손을 놓는 연습을 한다. 내가 낳았지만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은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아들을 대하려고 노력 중이다. 손을 놓고 떠나는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 아이의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을 한다는 기사를 봤다. 그리고 아이 아버지의 “우리 부부는 더이상 살 이유가 없습니다.”라는 기사도 봤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마음을 감히 어떻게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부디 부모님이 납득할 수 있는 사인이 밝혀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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