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이클라우드에 사진을 저장하며 정리하던 남편이 딸의 재미있는 옛날 사진과 동영상을 몇 개 찾아냈다.
“우와~~ 아빠 봐. 엄청 날씬했다.”
(그때도 뚱뚱하다고 했었는데 지금에 비하면 그땐 거의 젓가락 수준이네. ㅠㅠ)
“오~~ 엄마 엄청 젊다.”
(나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왔는데 20대의 동안과 30대의 동안 40대의 동안은… 한자가 다른가??? ㅠㅠ 지금도 나이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동안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젊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머~~ 나 좀 봐봐. 너무 귀엽다.”
(옛날 자기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자뻑하기도 쉽지 않은데 딸아~ 너의 자신감은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ㅋ)
유치원을 중퇴(?)하고 댄스학원에 등록하기 직전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를 부르며 춤을 따라 추는 딸의 동영상을 볼 때는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음치에 몸치에 아주 난리인데도 너무 열심히 추고 있던 6살의 꼬맹이. 6분 정도 분량의 동영상 속에서 13년 전의 작은 몸집의 딸은 열창을 하고 있었다. 보다 지친 남편이 “이건 도대체 누가 찍은 거야?”라고 할 때도 딸은 “엄마 아니면 아빠겠지.”라며 자기 모습에 반해 눈에서 하트를 내뿜고 있었다.
딸의 춤추는 영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모두 기암(?)하게 하고 재미있게 해 줬다. 한참 옛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겼던 딸이 말했다.
“사진 많이 찍어놔야겠다. 진짜 남는 게 사진뿐이네. 사진 보니까 기억나는 게 많아.”
남편이 부지런히 찍어 놓은 사진과 동영상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말처럼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뿐이 없었다. 눈에 담아 기억 저장소에 고이 모셔놓은 기억들은 자기 혼자서는 되살아나지 못한다. 사진이나 영상, 글이라는 열쇠가 있어야만 열리니 싫어도 귀찮아도 기록을 남기는 것은 필요한 일인 것이다.
며칠 후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고 박지선 님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채널을 돌리던 남편의 손이 멎었다.
“어? 이거 이렇게 방송해도 되는 건가?”
“어.. 그러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과 현재 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영상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을 볼 때면 그것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며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영상 속 떠난 주인공이 되었다, 영상 밖 남은 사람이 되었다 하며 슬픔과 기쁨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어렵다.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확실한 건 추억은 추억을 함께 한 이들과 같이 해야만 그 빛을 발한다는 것. 함께 하지 못하는 반쪽 자리 추억은 아쉬움이 남을 수 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