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김장철이다. 집 앞에 마트가 있을 때는 마트 앞에 갖가지 김장 속 재료가 쌓여있는 모습으로 김장철임을 알 수 있었는데 마트가 사라진 이후로는 내 주변에서 김장철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져 버렸다. 꼭 집 앞 마트가 사라진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해는 유독 김장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김포족(김장을 포기하는 사람)'과 '포김족(포기김치를 먹는 사람)'이 늘어나서지 않을까.
어느 신문 조사에 따르면 김장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 1위는 ‘고된 노동과 스트레스가 걱정돼서(31.2%)’이고 2위는 ‘긴 장마로 배추 등 채소값이 비싸서(28.1%)’, 3위는 ‘적은 식구 수로 김장이 불필요해서(16.4%)’라고 한다. 거기에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여럿이 모여하는 김장행사들도 전부 취소된 것도 '김포족'이 늘어난 원인이 되었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유다. 나도 김장을 하려고 할 때마다 고민을 하게 되니까. 20년 가까이 혼자 김장을 하고 있지만 할 때마다 '내년엔 사 먹어야지'하는 마음이 든다. 김장을 하는 것은 하루지만 준비과정은 그전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김장이 끝날 때까지 온통 신경이 김장에 가 있다.
인터넷으로 절임배추 주문하는 것은 김장 한 달 전에 해야 한다. 늦으면 원하는 날짜에 절임배추를 받을 수 없다.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절임배추 주문은 11월 중하순 주말이 제일 많기 때문에 김장 일주일 전이나 이주일 전에 주문하려고 하면 절대 날짜를 맞출 수가 없다. 그렇게 10월에 절임배추를 주문하고 나면 김장일 일주일 전부터는 각종 젓갈과 속재료를 주문한다. 사과, 양파, 마늘, 까나리액젓, 새우젓, 쪽파, 무. 나는 주로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때문에 날짜를 잘 맞추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몇 해 전 백령도에 까나리액젓을 주문했는데 섬에서 출발하는 택배는 하루 만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 탓에 김장일 아침 우체국까지 가서 택배를 찾아오는 수고를 했어야 했다. 그리고 절임배추가 오는 날(김장 전날)에는 김치 육수를 준비한다.
60킬로 절임배추에 들어갈 육수를 끓이려면 6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 짬짬이 무와 쪽파, 양파, 사과를 다듬고 씻어 놓으면 전날 작업 완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김장 당일. 아침 일찍 절임배추를 비닐봉지에서 꺼내 물 빼기를 시작하고 무를 채 썰고 양념을 준비한다. 전날 육수를 준비했음에도 사과, 양파를 가는 것이나 찹쌀풀은 당일에 준비해야 하니 무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속 편한 생각은 금물. 우리가 김장하는 모습 하면 떠오르는 절임배추 사이에 양념을 넣는 모습은 어쩌면 김장 중에서 가장 쉬운 작업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준비된 무채와 쪽파, 양념을 버무려 절임배추 속에 넣고 김치통에 담으면 김장이 끝난다.
전날부터 주방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딸이 말했다. “원래 전날부터 이렇게 할 일이 많았나? 김장이 큰맘 먹고 해야 하는 일이었구나.” 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김장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사는 40대는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많이 붙는다. ‘회식에 따라나서는 마지막 세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거기에 더해 이제 ‘마지막 김장하는 세대’까지.. 왠지 서글프다. ㅠㅠ
작년 집밥을 먹을 식구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60킬로 하던 김장을 40킬로로 줄여서 했었다. 줄어든 양과 도와주는 일손이 있어할 때는 수월하게 했는데 문제는 너무 맛있게 되었다는 점. 조금 하면 더 맛있게 되는 이유는 뭘까? 4월인데 김장김치가 떨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우리 집은 김치 소비량이 많은 편이다.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콩비지, 김치전, 김치 베이컨 말이. 김치가 없으면 안 되는 집이다 보니 알타리 김치를 2번 하고 10킬로 포장김치를 2번이나 사 먹아야 했다. 그래서 올해는 다시 60킬로 절임배추를 주문했는데 이번 김장엔 도와주던 아들이 없다.
남편이 도와준다 했지만 심부름꾼 역할은 남편보단 아들이 더 낫다. 분명 입으로는 "뭐 도와줄 거 없어?"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라고 하고 부탁하면 도와주는데 아직은 어렵다. 남편이 토를 달지 않고 도와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남편의 친절(?)이 익숙지 않아서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지만 결국 절임배추에 양념을 넣기 시작한 것은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마주 앉아 양념을 무치다 보니 아들 생각이 났다. 작년엔 아들이랑 남편이 양념 넣는 것을 다 했었다. 그 전해에도 남편이랑 아들이 했다. 그 전전해에도. 아들은 수능이 끝난 해부터 김장을 도왔다. 문득 방에 콕 처박혀 공부하는 딸이 생각나 남편에게 물었다.
"내년에 수능 끝나면 방에 계신 저 따님이 도움이 될까?"
그러자 남편의 칼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아들 제대할 때까지 김장 쉴까?"
"... 사 먹는 게 쌀까?"
"글쎄.. 모르겠네. 올해처럼 먹으면 하는 게 싼 것 같기도 하고.”
고춧가루 13만 원, 젓갈 8만 원, 사과 5만 원, 배추 12만 원.. 사 먹는 거랑 김장 담그는 거랑 그다지 차이가 안 나보이 긴 한다. 내년엔 진짜 사 먹어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며 김장을 하는데 남편이 배춧잎 한 장을 뜯어 김칫속을 얹어 먹으며 말했다.
"아들이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올해는 못 먹네."
"그러게. 김장하면서 엄청 뜯어먹고는 속 쓰린다 했었는데.."
김장을 도와주기에 너무 어린 나이일 때부터 아들은 김장하는 날이면 뜨끈한 밥 한 그릇을 물에 말아 양념을 묻히는 내 옆으로 왔었다. 내 어릴 적, 김장하는 엄마 옆에서 먹은 기억에 한 번 해줬었는데 아들은 그 밥과 김치가 그렇게 맛있다며 김장하는 날에는 꼭 밥에 물을 말아먹고는 했다. 그러다 김장을 도우면서는 양념을 묻히며 계속 배춧잎에 김칫속을 얹어 먹었다. 겉절이를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그리 먹는 것은 맛있다면서..
그 후로도 남편은 배춧잎을 뜯어 김치 속을 얹어 먹기를 몇 번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아들이 좋아했는데..'라며 아들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나나 남편이나 애정표현에 서툰 편이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라는 스타일. 특히 남편은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완전한 옛날 사람이었다. '남자 녀석이..' '아들은..'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한 편이라 아들에게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군대에 보내 놓으니 나보다 남편이 아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김장을 마치고 보쌈을 삶아 저녁을 먹으면서도 남편은 아들 생각이 나는 듯 말했다.
"오빠가 이거 참 좋아했는데.."
그러자 하루 종일 방에서 “오빠가.. “, “아들이..”를 들은 딸이 한마디 했다.
"누가 들으면 오빠가 죽은 줄 알겠네."
감성 파괴자 딸. ㅋㅋㅋ
번거로운 일이나 고단한 일, 어려운 일 뒤에 오는 보상은 더 달콤하다. 김장 후에 먹는 보쌈이 그렇다. 지금은 김장이 아니어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보쌈이지만 김장 후 돼지고기를 삶아 갓무친 김칫속과 먹는 보쌈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함께 한 가족의 추억을 담고 있어 특별하다. 언젠간 아이들의 “라떼는..”속에 김장과 보쌈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