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초라한 글을 씁니다.

by 꾸미



글을 씁니다.

내 생애 처음 생각을 글로 적어봅니다.

약속한 A4용지 한 장을 채우기 위해

하루 종일 오늘은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쓸지

고민을 하고 짬짬이 메모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규칙,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써야 한다던지,

목차를 정한다던지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저 하루하루 써내려 갑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한권 갖고 싶다라던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쓴다던가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은 아니예요.

아주 어릴 적 그 나이때의 모든 소녀들이

한번쯤은 거쳤을 문학 소녀였던 시절엔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죠.

야간 자율 학습을 하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던 시절에는

라디오 작가를 꿈꾸기도 했답니다.

의학 드라마 ‘종합 병원’을 보면서는

드라마 속 주인공인 멋진 의사를 꿈꿨고

안재욱, 최진실 주연의 ‘별은 내 가슴에’를 보면서는

멋진 왕자님을 만나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힘든 현실을 피해 늘 꿈 속에 살았어요.






그리고 더 이상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그 모든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드라마 작가를 꿈꾸었지요.

하지만 정작 그때까지 나는 꿈만 꾸었지 한번도,

단 한 줄의 글도 쓴 적이 없었어요.

그 흔한 일기도 쓰지 않았네요.

나름 ‘재미있어요’ 라는 댓글을 한 두개 받던

육아일기조차 멈춘 지가 언제인지.

덕분에 아들은 육아일기를 가지고 있지만

딸은 반쪽짜리 육아일기를 얻었네요.



학교를 졸업한 후 간간히 읽던 책마저

아이들의 그림책으로 대치되면서

나의 어휘 수준은 아이들과 동급이 되어 갔어요.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돌던 수많은 생각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내 안에서 방황하다 사라져 갔답니다.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돌던 수많은 생각들은

말로도 글로도 살아나지 못했죠.

내가 글만 쓸 수 있다면

세기의 대박 작가가 될 수 있을 텐데

왜 글이 안되는 걸까.

대문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만의 방이 없어서?

글쓰기 수업을 받지 않아서? 지식이 짧아서?

글을 쓸 생각보다는

글을 쓸 수 없었던 핑계를 찾는 일에 더 열중했어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가 필요했거든요.

그 시간에 일기라도 쓰려고 노력했다면

글쓰기 경험이라도 얻었을 텐데 말이죠.





얼마 전 미움 받을 용기의 저자

고가 후미타케의 <작가의 문장 수업>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말은 할 수 있는데 글은 한 줄도 못 쓰는 이유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도

번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을 잡아

글로 번역해 내는 것이

글을 쓰기 위한 첫번째 과정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생각했죠.

내가 그동안 글을 쓸 수 없었던 건

시간이 없어서도, 글쓰기 수업을 받지 않아서도 아니라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글로 번역하지 못해서구나.

내 생각과 글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다른 언어라는 것이

내 수준을 무시한, 잘 쓰려는 욕심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처음부터 세기의 유명한 작가들처럼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중압감에

결국 한 줄조차 쓸 수 없었다는 걸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봅니다.

시작과 끝이 다른 글이라도,

주제에서 빗나간 글이라도,

하루 A4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매일 매일 쓰지 못하더라도 글을 씁니다.

나조차 다시 읽지 못할 만큼

초라한 문장의 글을 씁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초라한 문장이 모여갑니다.

품어왔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첫날의 글은 격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까지 써야 할까 싶은 내용들.

하지만 다듬으려 했다면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또 다시 초라한 글조차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란 걸 압니다.


초라하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위로할 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도 없는

초라한 나의 글이 쌓여 갑니다.

언젠가 그 글들이

나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어 줄 거라 믿으며

오늘도 또 한 장을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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