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빨래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해요. 얼룩이 묻어있던 옷들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고.. 같은 이유에서 청소나 설거지를 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어수선한 공간은 생각도 어수선하게 만드니까요.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단순 노동이 도움이 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 기분 알아요. 그런데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아요. 뭐든 몰아서 하는 스타일. 특히 설거지는 하루에 한 번만 하면 되는 거라고 큰소리칩니다.
예전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그래도 하루 두 번은 설거지를 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이 크면서 집밥을 먹는 숫자가 줄어드니 설거지를 하루 한 번만 해도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더라고요. 남편은 신입사원 때도 안 하던 야근이 잦고 아이들도 친구 만난다 학원이다 해서 그나마 식구들이 한 곳에 모여 밥을 먹는 저녁시간마저 일주일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해지더군요.
설거지가 줄어든다는 게 가족과 얼굴 마주 보는 시간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줄 몰랐어요. 처음엔 삼시세끼 밥을 안 해도 된다는 게 참 좋았는데 지금은 조금 아쉬워집니다. 그렇다고 다시 설거지 잔뜩 쌓인 시간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는 않아요. ^^
5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식기 세척기를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만 해도 설거지가 제법 나오던 때이기도 했고 식기 세척기 선전이 한참 나오던 때였거든요.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에 양보하고 주부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라는 광고가 나오던 때죠. 대용량 빌트인 식기 세척기는 너무 비쌌고 2~3인용으로 싱크대 위에 놓는 작은 식기 세척기는 한 개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던 그때.. 집들이 하라며(제가 한 게 아닌 하라며가 중요!!) 놀러 오신 시어머니가 제 이야기를 듣고 그러시더군요.
"근데 너 집에서 노는데 식기 세척기까지 놓는 건 좀 그렇지 않냐? "
하.하.하
그렇게 제 식기 세척기는 물 건너갔습니다.
집에서 노는데..
시어머니한테는 제가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뭐 엄밀히 말하면 집에 있기는 했죠. 결혼 후 쭈욱 전업 주부였으니까요. 그렇다고 논 건 아닌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시어머니는 아들이 벌어 오는 돈을 본인은 구경도 못해보고 생전 처음 보는 며느리에게 뺏기는 것 같아 속상하셨나 봅니다.
아들이 안쓰러워서 그러셨을 거라는 생각은 10% 정도 듭니다. 왜냐고요? 원래 성격이 본인 위주로 뭐든 생각하시는 분이시고 본인은 뒤끝이 없는 깨끗한 성격이라시며 맘에 있는 말을 언제건 하셔야 하는 스타일이시거든요. 아마 제가 요즘 세대였으면 한바탕 난리 쳤을 텐데 전 잘 지내고 싶었고 싸우고 얼굴 붉히며 마주 보는 게 불편하고 싫었어요. 그냥 내가 참으면 그걸로 끝나겠거니.. 그 결과 시댁 가면 지금도 인간 식기 세척기가 됩니다. 그릇이 싱크대에 쌓일 세라 부지런히 씻고 또 씻고.. ㅎㅎ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에요. 며느리도 저랑 형님 둘인데 둘이서 서로 설거지하려고 싸워요. 일명 꿀보직!! 식구가 많지 않아 설거지 거리가 많이 나오진 않아요. 그래도 늘 설거지를 합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하기 싫은 설거지가 그곳에서는 제일 편하거든요. 싱크대 앞 작은 창으로 탁 트인 풍경을 보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시어머니의 "누구 집 아들들은~ 며느리들은~ 손자들은~ "으로 시작하는 하소연을 듣지 않아도 되거든요. 설거지하는데 누군가 그릇을 또 내온다고 해도 집에서라면 짜증 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멈췄을 설거지인데 시댁에서는 마냥 좋더라고요. 나만의 편안한 시간을 더 가질 수 있거든요. 시댁에서 유일하게 편안한 공간~~
오늘 아침은 저희 집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없어요. 어제저녁을 안 먹었거든요. 아들은 친구 만나러 느지막이 나갔고 딸은 친구들과 영화 보고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왔고 남편은 내년 일을 미리 당겨서 한다고 요즘 계속 야근이에요. 마침 집에 밥도 하나도 없어서 전 그냥 주말에 코스트코에서 사 온 삼진어묵 바 하나 데워 먹었더니 설거지가 없어요. 오늘따라 비어 있는 설거지통이 편하면서도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