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는 며칠 전 일이다.
학원에 다녀온 딸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실에 앉아 TV를 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너 벌써 데이터 1기가 썼다고 문자 왔다."
"응, 알아. 나한테도 왔어."
내가 보기엔 둘 다 일상적인 대화였다.
'힘들었지?' 라며 기분 좀 맞춰주고 밥을 차려 주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요즘 아이들이 그렇듯 핸드폰을 꺼내 좋아하는 양팡의 유튜브를 보며 밥그릇에 코를 박고 밥을 먹는 딸아이에게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갑자기 화장실 문을 쾅 닫는 남편. 나와 아이는 깜짝 놀라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넌 나갔다 들어오면서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하고, 아빠가 데이터 1기가 썼다고 하니까 인상이니 쓰고.."
잔뜩 화가 난 목소리의 남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고 나와 아이는 상황 파악을 하느라 멀뚱멀뚱 서 있었다.
잠시 뒤 딸은 밥숟가락을 들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인사는 했고 말이 끝나기 전 아빠의 말이 인사를 끊었고 인상을 쓴게 아니라 진눈깨비를 맞으며 언덕을 걸어올라와 춥고 힘든 표정이었을 뿐인데 밑도 끝도 없이 아빠에게 혼이 난 딸은 그동안의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아빠는 맨날 아빠 기분대로.. 돈 벌어오면 다야. 나도 안다고. 아빠가 힘들게 돈 벌어 오는 거. 학원 다니는 것도 눈치 보여 죽겠어.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학원 안 빠지고 나가고 성적 안 나오면 어쩌나 걱정돼서 미친 듯이 열심히 한다고. 그런데 아빠는 맨날 자기 기분 나쁘다고 아무 때나 화내. "
“아빠가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밤샘하고 피곤하시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많아 예민해지셔서 그래.”
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나대로 속상했다. ‘내가 돈을 벌었으면 이런 생각은 안 하고 살았을 텐데.’ 하는 도움 안 되는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 내 맘을 눈치라도 챈 듯 딸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도 일하잖아. 엄마도 힘든데 왜 맨날 아빠만 돈 번다고 유세 떨어? 우리 집에서 안 힘든 사람 누구 있어?"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밥도 못 먹고 울며 자리를 뜨는 딸아이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잠시 뒤 남편도 돌아왔다.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는 잠시 시간을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터다.
다음 날 친구를 만나고 꽁꽁 얼어 들어온 딸아이를 따끈따끈 데워놓은 침대에 눕히고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자라서 좋은 점은 이야기다 통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자라서 나쁜 점은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점이다. (상전 하나 추가요~~ ^^;;) 조금 기분이 누그러진 듯한 딸아이가 이불속에서 잠이 든 사이 남편이 퇴근해 돌아왔다. 이번에는 남편 차례.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맘에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 나쁜 점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남편과 딸의 정신연령이 조만간 만날 것 같다. ㅠㅠ) 중간에서 나의 노력(?)이 있기는 했지만,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얼굴 마주보며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남편과 딸의 전쟁(?) 은 발발 하루 만에 극적인 화해로 끝이 났다. 하지만.. 과연 딸의 마음 속에 이날의 앙금이 전부 사라졌을까?
가족 간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가족 간에 대화를 하기는 쉽지 않다. 집이라는, 개인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이어서 그런 것일까. 학교에서, 일터에서 꾹꾹 참고 있던 감정의 찌꺼기가 집에서의 작은 일에 폭발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못임을 알면서도 흔히 하는 실수다. 그리고 가족이니까 이해해 줄 거라 믿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렇게 그 일은 흐지부지 덮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감정을 폭발시킨 사람은 잊어도 감정의 폭발을 당한 사람은 그 앙금이 차곡차곡 쌓이다 또 다른 폭발을 일으킨다. 한 번 두 번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족 간의 대화가 끊기고 가족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결혼 전 나는 절대 부부싸움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부부싸움이 잦았고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을 보는 것은 늘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지거나 목소리에 기분 나쁨이 묻어있는지를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봐야 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다른 이의 행동과 목소리에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다른 이들은 이런 나에게 눈치가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타인과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하나의 장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만큼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대화를 피하게 되는 이유가 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부부싸움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남남으로 살다 함께 하게 된 두 성인이 어떻게 매일매일이 꽃길일 수만 있겠는가. 대화로 풀면 되지 하지만 가깝기 때문에 대화가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말을 하면 싸움이 될까 피한다는 것이 결국엔 대화의 단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가족이니까 대화가 필요하단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남편과 아이들이 내 대화 시도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일단 듣기,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되 나의 감정도 제대로 알기, 공손하되 비굴하지 않게 이야기하기. 가족이 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