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밸런타인데이다. 연애 시절엔 설이나 추석보다 큰 명절(?)이었는데 지금은 장 보러 간 마트에 갑자기 늘어난 초콜릿을 봐야 아~~ 하고 기억이 나는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올 밸런타인데이 역시 ebs 라디오 일본어를 듣다 알게 되었다. ‘벌써 밸런타인데이가 돌아왔구나, 오늘이 며칠이지?’
일본에서는 밸런타인데이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줄 목적으로 구매하는 초콜릿의 비중이 1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요즘 누가 유치하게 초콜릿을 주며 호감을 표하겠어? 딸아이만 봐도 밸런타인데이에는 친구끼리도 초콜릿을 주고받지 않는다. 아마 가장 큰 원인은 봄방학 기간이라는 것이지 싶지만 대학생 아들도 여자 친구와 안 주고 안 받기 한다니 요즘 신세대들은 실용적인 면을 더 중시하나 싶기도 하다.
남편에게 준 첫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은 내가 직접 만들어줬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 남자는 여자가 만들어 주는 선물을 싫어한단다. 여자는 왜 정성이라며 자신이 만든 쓸모도 없고 가격도 싼 선물을 안기고 남자에게는 비싼 고가의 선물을 원하냐는 내면(?)의 소리가 있더군.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하다. 남자 친구가 정성이라며 종이학 같은 걸 만들어 선물한다면 여자도 썩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 나 종이학부터 쿠션까지 다양한 공예(?)품들을 줬는데 남편도 싫었을라나. 하긴 지금 보니 처치곤란하긴 하네. - 암튼 그 당시는 연애 초기였고 다른 이의 연애 스토리와 드라마에서 보고 들은 연애 방식을 모조리 따라 해 보고 싶던 욕구가 가득하던 때라 정성 듬뿍 넣어 초콜릿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의욕은 가득 하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다. 초콜릿 원료를 사서 녹여 만들어야 하는 것을 모른 채 동네 마트에서 가나 초콜릿을 한 박스 구입, 냄비에 정성껏 녹여 생크림 듬뿍 넣어 동글동글 모양을 만든 나의 첫 초콜릿은 시간이 지나도 당최 굳지를 않았다. 어찌 저찌 만들어 상자에 포장은 했지만 나의 첫 초콜릿은 초콜릿 속의 시럽 같은 느낌의 초콜릿 덩어리로 엄청난 당도를 자랑하는 희대의 망작으로 남았다. 후에 전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남편은 너무 달아 하나 먹고 포기, 지금의 형님이 맛있다고 다 드셨다고 한다. 가끔 내가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만들기 DIY 세트에 관심을 가지면 남편은 몸서리를 치며 말린다. 그냥 사 먹자고. ㅋ 그래, 그런 실수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지.
그 후 연애 시절 동안 우리에게 밸런타인데이는 1년의 기념일을 시작하는 성스러운(?) 날로 자리 잡았다. 내 입장에선 이 날 초콜릿을 줘야 화이트 데이에 오는 것이 있을 터이니 크건 작건 선물을 해야 했지만.. ^^;; 그리고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각종 기념일에 둔해졌다. 그에 반해 남편은 ‘이 사람이 이렇게 기념일을 잘 챙기고 선물을 좋아했나’ 싶게 기념일 보름 전부터 기분이 들떠 선물 타령을 하고 다녔다. 나는 2배로 늘어난 집안 대소사를 먼저 챙기느라 정작 우리의 기념일은 챙길 여력이 없었다. 가끔은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남자가 주는 건지 여자가 주는 건지 헷갈리고 남편에게 초콜릿을 내놓으라 큰소리친 적도 있다. 결혼기념일은 지금도 깜빡깜빡한다. 25일인가? 27일인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설정해 놓은 알람이 실수로 울리지라도 않으면 진짜 낭패를 봐야만 했다.
왜 연애는 환상, 결혼은 현실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남편의 기억 속에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 아이들이 각종 ~~ 데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물론 우리를 챙기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 동성 친구들끼리 주고받는다는 핑계로 호감 가는 이성에게 슬쩍 한 개 투척(?)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잡다한 초콜릿을 구입하다 보니 우리의 연애 시절이 떠올랐다. 하는 김에 나도 하나? ^^
아이와 함께 하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은 작고 유치했다. 미니쉘, ABC 초콜릿, 내가 좋아하는 트윅스, 남편이 좋아하는 페레로로쉐 한두 알, 딸이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 뭐든 잘 먹는 아들은 아무거나.. 잡다한 초콜릿을 섞어 다소 허접한 포장을 하고 힘든 직장 생활에 잠시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남편 몰래 출근 가방에 넣어 두었다. 모양은 작아지고 초콜릿은 가장 대중적이고 저렴한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더 커졌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시작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이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아이가 다 자라 작고 유치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을 할 핑계도 사라졌다. 기념일 챙기기를 좋아하던 남편도 몇 년 전부턴 신경 쓰는 게 귀찮아졌는지 안 주고 안 받기 하자고 선언을 했다. 확실히 안 주고 안 받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아도 돼서 좋기는 한데 가끔 남편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던 연애 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판매사의 상술이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각종 기념일을 탄생시켰다는 말도 있다. 상술이면 어떠한가. 작은 초콜릿 하나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추억을 소환할 수 있으며 생활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상술 같아 보이진 않는다. 올 밸런타인데이에는 오랜만에 남편에게 초콜릿 선물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