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인가 남편과 딸, 둘이서 오션 월드에 간 적이 있다.
고등학생인 오빠 때문에 휴가를 가지 못한 여름의 끝무렵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름 방학 동안 집콕만 한 딸이 안쓰러워서라고 했지만 내심 본인이 놀고 싶었던 것 같은 남편이 당일치기로 딸만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네 식구가 아닌 둘, 둘로 나뉜 것이. 지금은 명절을 제외하고 네 식구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졌지만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진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1년에 서너 번씩 여행을 다니곤 했었다.
처음으로 둘만 보내면서 걱정을 했었다. 남편과 딸은 성격이 비슷해 둘이 함께 있으면 늘 불안 불안하다. 물론 마주 보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은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가끔(아니 종종인가??) 우리들은 기분 나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그날은 둘이 무탈하게 잘 놀고 왔던 것 같다.
“재미있었어? 날씨는 괜찮았고? 사람은 많았어?”
궁금해 묻는 나에게 딸은 신나게 말했다.
“응. 날씨가 흐리고 바람 불어서 걱정했는데 가니까 바람도 안 불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놀기 좋았어.”
“다행이네. 배 안 고팠어?”
“응. 들어가기 전에 근처 편의점에서 아빠랑 라면이랑 떡볶이 먹었어. 맛있더라고.”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편의점에서는 김치랑 단무지도 주대. 근데 단무지 보더니 채원이가 엄마 생각난다고 하더라.”
“잉? 왜?”
“엄마 단무지 좋아하잖아. 단무지 보니까 엄마 생각나더라고.”
“ㅋ 내 제사상엔 단무지만 올라오겠네.”
엄마 생각을 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고작 단무지에 생각나는 엄마라 슬프다고 해야 할지 기분이 애매했다.
내가 단무지를 좋아하긴 한다. 중국집, 분식집을 가면 꼭 단무지랑 김치를 먼저 먹어 본다. 나에겐 단무지랑 김치가 맛있어야 맛집이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단무지랑 김치 남기는 꼴은 못 보니. ㅎㅎ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나는 그저 다 잘 먹는데 맛있어서 더 잘 먹는다 정도로 생각했지, 단무지를 특히 좋아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딸이 그런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알지 못했다. 첫째를 낳고 미역국만 네 끼를 주는 시어머니에게 친정 엄마는 “우리 애가 미역국을 좋아해서 저렇게 먹지 그렇지 않으면 못 먹어요.” 하셨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미역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무지도 마찬가지다. 딸이 엄마가 단무지를 좋아한다고 해서야 그렇구나 했다. 김치찌개도, 비빔밥도 함께 밥을 먹는 남편이 “넌 음식점 가면 언제나 비빔밥 아니면 김치찌개만 먹더라.” 해서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단무지를 보며 나를 생각한 딸을 보니 문득 친정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는 뭐든 잘 드셨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분명 무언가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셨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나는 나에 대해서만 모르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걸까. 이기적인 걸까.
큰 아이가 4살 때 암투병 중이시던 엄마와 근처 공원에 소풍을 나갔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할 줄 아는 음식 중 유일하게, 모든 사람이 맛있게 먹는 것이 있었다. 바로 김밥. 그때만 해도 김밥천국 같은 김밥전문점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라 김밥은 큰 맘먹고 준비하는 나름 이벤트 음식이었다. 한 번에 20줄씩 김밥을 싸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렇게 싼 김밥은 남편 회사에 보내고도 하루 종일 밥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지금도 남편 회사 동료들이 남편에게 "형수님 김밥이 맛있었는데.. 언제 또 싸오세요."라고 할 정도로 내 김밥은 맛있다(.. 고 한다. ^^) 그날도 당당히 김밥을 싸 엄마를 모시고 소풍을 나갔다. 공원을 거닐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김밥을 먹으려고 꺼내놓는데 엄마가 가방에서 김치를 꺼내셨다. 무슨 김밥과 김치를 먹냐며 핀잔을 주었는데 막상 한 입 먹어보니 김밥과 먹는 김치가 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집에서 김밥을 먹을 때는 분명 아무것도 없이 먹어도 맛있었는데.. 아니지 김밥엔 단무지가 짝꿍 아녔던가? 그런데 김치가 김밥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니.. 의아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밖에 나와서 먹을 땐 무조건 김치가 있어야 해. 김치가 제일 맛있어. 김치만 있음 밖에선 맨밥이랑만 먹어도 맛나다.” 항암치료를 하느라 입맛이 없던 엄마는 그날 오랜만에 내가 싼 김밥과 엄마가 가져온 김치를 맛나게 드셨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을 더 오래,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실제로, 늘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서인지 내가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대부분 우울하고 힘들고 슬픈 일들 뿐이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엄마가 행복해 보였던 모습으로 남은 기억이 그 날이었다. 항암제 때문에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은 없으셨지만 그 날의 엄마의 얼굴을 더없이 밝았었다. '그래, 앞으로는 의식적으로 엄마 생각이 날 때면 이 기억을 떠올려야겠다. 이런 건 기억을 왜곡해도 돼. 슬프고 아픈 얼굴의 엄마만 기억할 순 없어.'
단무지면 어때?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나를 떠올리건 늘 행복했던 웃는 얼굴의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엄마를 생각하면 미소지을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