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찬혁 Mar 30. 2024

번호라도 물어볼걸

이미 떠나버린 기차

 

 그녀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이따금 기찻길에 오르곤 한다.


 그때는 벚꽃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쌀쌀한 봄이었다.

 나는 마산에 일이 있어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장차 3시간이라는 긴 여정 길이었기에 심심함을 달래고자 가방에서 어제 읽다만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 10 페이지 가량 읽었을까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성이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기에 싫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앞 좌석에 붙어있는 테이블을 꺼내고는 커피와 빗, 보조배터리, 핸드폰, 오늘 산 듯한 이어폰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석과 테이블 사이. 그 작은 틈에 그녀의 '파란 빗'이 들어가 버렸다.

 금방 꺼내겠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빗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도와줘야겠다 생각하고 책을 덮자, 그녀가 나에게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구원의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앞 좌석에 붙어있는 잡지를 꺼내 들고는

 "이걸로 꺼내 보시겠어요?"

 라는 말과 함께 잡지를 건넸다.

 그녀는 잡지를 받고선 틈 사이로 집어넣어 빗을 올리기 시작했다. 틈 사이로 빗이 조금씩 올라오자 나는 재빠르게 빗을 낚아챘다. 그렇게 빼낸 빗을 그녀에게 돌려주자 부끄럽기라도 한 듯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빗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금 듣고 싶다는 생각에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금세 생각을 고이 접어 조심히 넣었다.


 그렇게 1, 2시간가량 책을 읽었고, 그녀는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해명을 잠깐 하자면 보고 싶어서 몰래 훔쳐본 것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남을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었다. 그 어쩔 수 없는 습관 때문에 나는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손톱이었다. 그녀의 손톱은 알록달록한 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곳을 따라 내려가니 자그마한 손이 보였다. 그 작은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았다.

 그때 어째서 다행이라는 감정이 들었을까.


 그녀는 은색 목걸이와 반짝이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고, 덥기라도 한 듯 머리를 꽉 묶은 포니테일 덕에 목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묶은 머리 사이로는 회색빛깔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더더욱 눈길이 갔다. 이미 책은 뒷전이었다.

 그녀는 까마귀 같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몸을 숨겼고, 그에 맞는 검정 가방을 들고 있었다.

 솔직히 얼굴은 기억에 잘 나지 않는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도 했고, 들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얼굴은 웃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때 그녀는 내 쪽에 있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고, 괜스레 찔려 움찔하고야 말았다.

 아마 그녀도 봤겠지라는 생각에 있을 리 만무한 쥐구멍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잡히지도 않고 무심하게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시고는 가방을 메고 바깥 복도로 향했다.

 나도 이때다 싶어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마치고 자리로 가는데 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보다 15cm는 더 작았고, 유연성이 아주 좋았다. 그런 그녀에게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는 작은 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도 금세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눈은 다시 책으로 향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그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는 새에 그녀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몇 모금 마시더니 사레라도 들린 건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가 걱정되었고, 그때 가방에 휴지가 들어 있던 게 떠올랐다.

 그녀를 바라보고는

 "저한테 휴지가 있는데, 휴지라도 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기침이 나오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휴지를 건네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기침이 나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5분 정도 뒤에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휴지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감사하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그런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누던 찰나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곳이 너무나도 빨리 도착하고 만 것이다.

 용기를 내서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녀를 도와줄 '선의'와 휴지를 가지고 다니는 '준비성'은 있어도 그녀의 번호를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 결국 내릴 때가 되자 그녀는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 그녀는 뒤 사람과 부딪히는 바람에 튕겨 나와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지었고, 그녀도 덩달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시간이 되어 물어보지도 못한다.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냐고.

 한탄을 입에 가득 담고는 밖으로 향했다.

 나가기 직전 그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녀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고, 기차는 매정하게 출발하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걸으며 그녀가 보이진 않을까 하고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녀는 내가 앉았던 창가 쪽 자리로 옮기고선 나를 찾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마주쳤다.

 그때 그녀가 웃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은 그녀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왜 그때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나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구나.' 바로 옆에 목적지가 있음에도 나는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이후로 역을 나와 먹은 음식, 만난 사람. 그 무엇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날은 그녀로 가득했고,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날 밤 잠이 들기 직전까지 이름 모를 그녀를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