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어김없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학교로 향한다.
매일 똑같은 하루, 똑같은 일상. 언제까지 이런 미로 같은 나날들이 반복될까.
이제는 숨쉬기조차 버겁다. 누가 들으면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라는 건가. 내가 힘들다는데, 내가 버티기 힘들다는데.
한풀이를 좀 하자면. 내 인생은 최악이다. 첫걸음부터 문제였던 듯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나 같은 녀석을 부족함 없이 키우겠다고 낮 밤 할 것 없이 일을 하셨다. 그저 일만 말이다.
당시에는 철이 없었다. 그저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뭐라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별을 세듯 수없이 해왔다. 그저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저 안아주기 위해서, 같이 울어주기 위해서, 함께 하기 위해. 가족이니까.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제 와서 당연시했던 시간을 그저 회상밖에 못하며, 이제는 없는 어머니를 외치는 자신이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항상 해오던 재능을 살려 연극학과로 진학했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연극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 말하려면 시시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나는 이런 시시한 것을 좋아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기에 어쩔 수 없이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위한 짤막한 이야기만 전하겠다. 우선 이 이야기를 전하려면 고등학교 시절로 가야 한다. 그 시절 나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 동아리 담당 교사는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시와 각종 교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교로 진학했다는 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이다. 이래서 하기 싫었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 연기란 일상이 되었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힘들지 않은 척. 사랑한 척. 좋아한 척. 싫어하지 않은 척. 그리고 또 척.
나는 언제 나에게 진실되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할 것도 없다. 애당초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우습지 않은가. 이런 최악인 인간도 남들처럼 대학을 다니며 연애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 꽃을 피우는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간다. 숨쉬기조차 역해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곳. 끝없이 이어져 온 이 낭떠러지에서 나는 추락했다.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이런 물음만이 그나마 유희거리가 되었다. 답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을 던질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끝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 나뭇가지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나를 걸어 주었다.
잡아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전공 교수님이었다.
갑자기 무슨 교수님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도 그게 의문이었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 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드니 말이다. 어쨌든 그분의 뜻밖의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분의 선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선의를 의심했다. 당연했다. 이유가 불분명했으니까.
그 사람의 위선, 나를 불쌍히 여겨 불우이웃 돕기라도 하나보다 생각했다.
물론 오만이었다. 착각에서부터 시작된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다. 그분을 착각과 혐오로 시작하여 그 마지막에는 존경과 사랑만이 남았다. 교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멈춰 있던 시계가 기지개를 켰고, 시곗바늘들이 하나둘씩 자기에게 부여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분과 덧없이 친해졌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뭐가 문제인가, 언제부터 남의 시선을 신경 썼다고.
그 뒤로 교수님과 단 둘이 술을 마신 적도 있었고, 누구한테도 말은 못 하지만 - 지금은 말할 수 있다. - 교수님께서 원래보다 성적을 좋게 주신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래 또 어김없이 오는 날. 그날도 어김없이 교수님과 술자리를 가졌다.
어째서였을까. 그날따라 술이 잘 들어갔고, 공허하면서도 환상으로 가득한 세계가 들어감에 따라 심장도 덩달아 신이 난 듯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심장이 부끄럽기라도 한 듯 얼굴은 잔뜩 시뻘게져서 교수님 눈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고는 몹쓸 짓을 해버렸다.
인생사를 풀어버리는 짓 말이다.
지금까지 사슬과 족쇄로 묶여있었던 탓인지, 봉인이 풀려버린 입은 날개가 돋은 듯이 가벼웠다. 나도 모르는 내면까지 그분에게, 나의 스승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나의 말에 경청해 주셨다.
어쩌면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위대한 연기자니까.
나는 그분의 경청에 신이 나서 더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분의 표정이 바뀐 것은 아버지 이야기를 나열한 순간이었다.
표정을 보니 실수라도 저지른 듯하여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나의 심장도 덩달아 식기 시작했다. 나의 춤사위는 멈췄으며, 그분은 불쾌감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이 또한 연기이기를.
교수님은 시간이 늦었다며, 그만 일어나자고 하였다.
역시 실수를 한 모양이었나 보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홀린 듯이 옛날 사진들로 가득한 앨범을 미친 듯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는 나의 갓난아기 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뒤로 쏜살같이 넘기니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곤 다시 심장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늘 교수님을 만나서였을까, 빌어먹을 아버지의 모습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옛날에 할머니가 얘기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종종 어머니는 불쌍한 여자이니 항상 잘하라고 신신당부하고는 했다. 그러고는 나의 아버지는 똑똑했지만, 이기적인 모험가이자 몽상가였다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가족까지도 버리는 파렴치한이었다고 욕을 하셨다.
할머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나처럼 심장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졌고, 말이 빨라졌다. 왠지 모르게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좋았다.
어머니의 사진을 다시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이 얼마 만인지 생각하고는 앨범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떼어냈다. 말도 안 됐다. 누가 봐도 이건 신의 장난이었다. 감히 누가 이딴 장난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진 뒤에는 아기 때의 나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있었다. 나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매와 빌어먹게 넓은 이마였다. 어릴 때부터 이 눈매 때문에 학교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형들에게 매질을 당하였고, 이 보기 흉한 넓은 이마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받기도 했다. 더 지나서는 나와 교재 중이던 여성조차도 벌레를 볼 때 짓던 표정을 보일 정도였으니까. 이에 대해 좀 더 말해주자면 그 여성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인식하자마자 멋쩍은 듯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같잖지도 않은 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칭찬했다. 아주 우스운 연기의 향연이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픔으로 치부했던 것들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니 다시금 혐오감이 치솟았다.
근데 어째선지 아버지의 모습은 낯이 익었다. 분명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예전의 기억일 터인데.
나는 몽상에 빠졌다. 가끔 이런 몽상에 빠지고는 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교수님이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저 바람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나는 그 사진을 안은 채로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2
다음날 지끈 거리는 머리를 짚고서는 일어나 등굣길에 나섰다.
오늘은 존경하는 교수님의 수업이라 뺄 수 없었다.
그분에게 만큼은 미움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당연하게도 오늘 수업은 유익했다. 메소드 연기에 대해 배웠고, 교수님의 연기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였기 때문이다.
심장이 다시금 요동쳤다.
그분의 연기는 황홀했고, 나의 눈은 그분의 행위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분의 포로가 되었다.
그분의 모든 걸 벨듯한 날카로운 눈빛, 인자함을 나타내는 넓디넓은 이마, 그래 나도 안다.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또한 어제를 떠올리며 의문을 띄웠으니까.
왜 낯이 익을까, 뭔가와 닮아있었다.
그래. 빌어먹을 아버지의 옛 사진과 지금의 교수님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아니 내 머리가 또다시 망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저명하신 교수님께서 내 아버지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날 나는 교수님에 대한 모든 수소문을 조사하고, 파헤쳤다.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학우들부터 시작해 교수님과 친한 분들까지 모든 것을 찾아봤다. 그분은 나처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리고 결국엔 찾아냈다. 단 한 조각의 퍼즐을.
교수님은 젊었을 적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지만 희귀병 때문에 그들을 떠났다고 한다. 그 퍼즐이 나의 퍼즐과 맞는지는 대조해 봐야만 알 것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사념에 빠졌다. 망상에는 자주 빠져도 사념에 빠진 적은 몇 없었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그건 아마 교수님도 마찬가지리라.
그날 왜 교수님은 표정이 변했을까, 이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순간 사념을 헤치고선 현실이 개입하였다.
내일은 팀원들과 단체 연기를 하는 날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오늘 밤을 새우면서까지 팀원들과 합을 맞췄어야 했다.
그들이나 나에게나 학점은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내일 함께하지 않으리라, 내일 날이 밝는 순간 바로 교수님을 찾아가리라.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계획대로 학교에 가 교수님을 찾아다녔다.
찾던 와중 팀원들이 와서는 왜 이제 왔냐고, 연습은 했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생을 표현했다.
마음에도 없는 허상으로 가득한 말을 남기며, 미안하다고, 몸이 너무 좋지 않다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추악한 나를 남기고는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친 곳의 끝에는 애타게 찼던 교수님이 있었다.
교수님은 애연가답게 담배를 물고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이것도 오늘 물어보리라.
나는 교수님의 성함을 부르며, 그분에게 달려갔다. 교수님은 오늘따라 왠지 나를 보는 눈빛이 사뭇 달라 보였다. 마치 자식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교수님에게로 달려갔고, 교수님도 나에게 달려왔다. 미친 듯이.
교수님은 물고 있던 담배를 오른손에 잡더니 황소처럼 달려와 나를 넘어뜨리고는 담배를 나의 눈에 지지려고 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희망이라고 여기던 것이 왜 이렇게 아프고 뜨거운 것일까.
나만 이런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이런 것인가.
신이란 작자는 왜 나한테만 이런 예외를 준 것일까.
나에게 일말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기는 할까.
이 와중에 교수님의 얼굴에서 아버지나 찾고 있다니, 역시나 나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옆에 있던 학우들은 이것이 교수님의 메소드 연기를 선보인 다고 생각했는지 존경의 눈빛으로 이 광경을 쳐다보았다.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다고 뭘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칠까, 애원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까, 내 눈물로 저 담배를 끄기라도 할까.
상황과 맞지 않는 웃음이 스멀스멀 흘러들어올 때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때 깨달았다.
내 얼굴에는 이미 타오르는 담배가 왼쪽 뺨에 다가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순간 연기가 아니란 걸 깨닫기라도 한 듯 사람들이 다가와 우리를 갈라놓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나는 충격에 빠져 기절해 버렸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새 하얀 천장과 마주했다.
내가 일어남과 동시에 어떻게 알았는지 뚱뚱한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충 진찰하더니 신경질 적인 말투로 안정을 취하라는 형식적인 말을 뒤로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충격이 가시지 않자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갔다. 좀 걷다 보니 환자복을 입은 교수님이 보였다. 교수님은 악령이라도 본 듯 나의 눈과 이마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할 말이 많은 표정을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지나칠 뿐이었다.
교수님을 수소문했을 당시 들은 얘기가 있다.
그는 정신병이 있다고,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희귀병이 있다고.
하지만 심하지는 않아서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지만 하필이면 그날 그런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무심하기도 한 신님.
나는 다시금 족쇄를 걸고는 자진해서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끝없이 이어져 평생을 걸어도 탈출하지 못할 미로 속으로 말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소의 머리를 한 인간의 형태가 나를 죽일 듯이 쫓아오는 꿈을 꾸고는 한다.
3
악몽이라 치부하고, 다시금 등굣길에 나섰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했다.
교수님은 아직도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지, 다른 교수가 들어와서 수업을 진행했다.
이제 강의를 들을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팀원들에게 가 사과를 거듭 반복했다.
우려했던 대로 그들은 그날의 사건을 알고 있었고, 측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학교에는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이 퍼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토록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탑들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너진 탑을 뒤로하고는 이미 더럽혀졌다는 듯 학우들의 걱정과 호기심에 나다운 답을 해주며, 미로 속으로 다시금 도망쳤다.
악몽 같았던 미로가 이제는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몇 주 동안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신은 실낱같은 빛을 보내주었다.
과연 내게 보내준 것은 빛이었을까, 저편의 그림자였을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 사실을 모르겠다.
어느 한 남자가 찾아와서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장난이라도 치러 온 듯했지만 이야기는 들어보고 싶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작가라는 현실성 없는 꿈을 위해 우리를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얘기했다. 처음에는 빨리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다시 귀국했을 때는 가족들에게 질타와 맹렬한 눈빛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도망쳤다고 한다. 히스테릭한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버릴 이유란 말인가. 이딴 게 진정 가족을 버릴 이유가 될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아무리 힘들어도 같이 이겨나가고, 함께 걸어가는 존재가 아닌가. 근데 대체 이 작자는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하필 이럴 때, 그래 역시 이것도 연기겠지.
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언어유희적으로 행복한 꿈마저도 꿔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작가라는 꿈을 설명했을 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들은 이해가 가는가, 꿈이 과연 가족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거기에 더해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남자도 날카로운 눈매와 넓은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교수님과 그 남자, 알 수 없는 악령들이 나의 망상에 침입하여 괴롭힌다.
이제야 미로가 집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는데 거기에 악령들까지 침입해 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일단 나는 이 남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을 꾸기 위해 잠에 들었다.
그 꿈에서
나는 도망쳤다. 미궁 속에서.
그러곤 마주쳤다. 악령들을.
4
며칠 뒤 학교에 갔다. 그날은 강의가 없음에도 학교에 간 것이다.
이제는 미로 속이 아니면 살지 못하는가 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태양은 자신을 뽐내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건물 꼭대기에 서있는 한 형태가 말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말을 한참을 내지르고는 두 팔을 쫙 벌리더니 떨어졌다.
햇빛이 눈이 부셔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이상야릇한 소리와 함께 시체가 나부라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기에 경악하는 표정과 함께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를 애도하는 척. 위로하는 척. 무서운 척. 척. 척.
점점 미쳐가는 가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이 있는 것이 있다면 연기였다.
그런 연기로도 이겨낼 수는 없었는지 그만 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 앞에서 폭소를 터뜨려 버렸다.
사람들은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 모습에 환멸감을 느껴 더 크게 폭소했다.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5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이상한 정장을 입은 사내들과 상담관으로 보이는 여자가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나에게 몇 마디 질문을 던지더니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시금 현실이 찾아왔다. 이제는 월세를 낼 돈도, 밥을 할 지식과 경험도, 학교를 갈 정신력도 이제는 무엇 하나 남아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수긍하고서는 따라나섰다.
나는 범죄자다.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행인 점은 병원에서 나오는 밥은 맛있었고, 메트릭스는 딱딱했지만 이불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곳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연기를 하는 빈도도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소의 머리를 한 인간이 미친 듯이 쫓아오는 꿈을 꾸고는 했다.
나의 인생에서 찾아온 것이 한 줄기의 빛인지 아니면 저 뒤편에 있는 그림자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둘 다 일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적어도 교수와 이름 모를 남자 그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테니, 만약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그 뒤로 가면을 쓴 의사와 간호사들이 몇 번 더 찾아왔다. 그러고는 진찰을 하면서 말을 보내왔다. 그러고는 나도 그들에게 무슨 말을 던져 줬는데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때 진실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면을 부수기라도 할 듯이 말을 쏘아붙였다.
이제는 입에 무겁기만 하던 족쇄와 사슬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올 폭풍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지금을 즐기자, 드디어 나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후로 상담관과 상담할 때에도 나에 대한 모든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참고로 나는 지금 맨 정신이다!
6
몇 주 뒤에 이상하게도 학우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들이랑 친했던가, 나는 날아갈 듯 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그들이 견딜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지금의 나라면 가능했고, 결과는 당연했다. 그들은 기겁하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고는 몇 분 정도 지나자 나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선 나가버렸다. 문을 닫은 후에도 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래도 나는 그 모습이 즐거웠다. 행복했다.
그 뒤로 색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무슨 꿈인지는 깨어나는 순간 까먹어 버렸지만 확실한 것은 행복한 꿈이었다는 것이다.
점점 나의 상태가 괜찮아지고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그날은 본인을 아버지라고 지껄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제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남자는 처음에는 놀란 듯 보였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제는 누가 아버지인지는 상관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이야기하고는 시간이 다 됐다며 병원에 나갔고, 나는 지쳐 잠에 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행복한 꿈을 꾸었고, 당연히 기억은 하지 못했다. 다음날 교수님이 찾아왔다. 나는 이미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교수님을 맞이했다. 교수님은 사과를 하며 용서를 빌었고, 나는 별일 아니라며 용서해 주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참고로 왼쪽 뺨에는 화상 흉터가 남아있었다.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쌓여있던 의문과 궁금증을 그에게 날리기 시작했고, 그도 바라던 바라는 듯이 모든 것에 대답해 주었다. 이런 공방은 몇 시간가량 지속되었다. 그의 말과 내 생각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교수님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와 비슷한 가정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처음 다가왔던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오히려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는 누가 그림자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가량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이제는 빛을 만날 차례였다.
삼일 정도 지나니 내가 기다리던 남자가 찾아왔다. 작은 남자아이와 함께 말이다. 나는 저 남자아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들이란다. 아들! 나를 또다시 버린 것인가 싶었다. 다시 버려지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계속해서 괴롭혀 온다. 미로 속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저 작은 악령은 나를 형이라는 혐오스러운 표현을 계속 강조하듯이 언급했다. 병원이 아니었으면 저 녀석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 남자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몇 년 뒤 새 가정을 꾸렸고, 저 아이는 그때 낳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게 되고, 예전의 가족이 그리워진 건지 아니면 죄책감에 시달려서인지 나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자도 그림자였다. 빛이 너무나도 강해서 속았지만 저편의 그림자마저 빨아들이는 심연이었다. 나는 당장 나가라고 그에게 소리쳤다. 간호사들은 그 소리에 놀란 나머지 나에게 진정제를 투여했고, 악령들을 데리고 나갔다.
7
다시금 꿈을 꾼다. 미로 속에서 소머리를 한 인간이 나를 쫓아오며, 그렇게 도망친 끝에는 악령이 기다리고 있는 꿈을 말이다.
그 일 이후로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었고, 단지 신과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아버지는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 내 모습이 우스운가.
괜찮다. 나도 이런 자신이 우스우니까, 나 자신이!
이제는 기억 속 마지막 단편에 대해 말하기로 하겠다.
- 당신들이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이 글을 쓴 뒤에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니까, 그날은 신에게 말을 거는 대신 수줍은 듯이 웨딩 베일을 덮은 달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신이 나에게 그림자를 준 것처럼 추파를 던져 주었다.
적어도 그녀는 신과는 다르게 빛을 보내왔다. 내면을 비추어 주는 빛이었고, 황홀감이었다. 꿈도 가져 본 적 없는 내가 이제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꿈, 사랑이었다.
그녀가 비춰준 나의 내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곳은 광활하고,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괴물이 쫓아왔다. 그리고 그 미지의 끝에는 악령들이 기다렸고, 그들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진한 심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야 하며, 탈출할 수도 없는 미궁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내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그 내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상야릇한 소리와 함께 괴물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추파를 던지고 있다.
이 끝에는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가야 한다.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그대들은 이 미궁 속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아는가.
안다면 부디 그 방법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만약 모른다면 그녀에게 금방 갈 터이니 기다려 달라고, 안부라도 전해주기를 바란다.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