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고통의 꽃이 대지를 뒤덮고, 내면의 더러움과 추악함이 빛을 피해 달아나는 곳. 그것이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광경에 대한 평가였다.
이곳은 절과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확연히 달랐으며, 자연과는 이미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나는 그런 장소에 매료되어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토록 완벽한 장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저 앞에서 떠들어 대는 세 사람일 터였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먼저 있었다는 추론은 가능했다.
내가 이들과 함께 있는 이유가 뭔지, 애당초 왜 여기서 눈을 떴는지, 수많은 의문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어째서인지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저 저 사람들을 내 시야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만이 나를 지배할 뿐이었다. 그런 충동을 겨우 억제하며, 앞에서 떠들고 있는 세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푸근한 인상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덩치 큰 남성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에 갇혀 있는 듯 울림이 있고 차분했는데, 그것을 듣고 있자니 나까지 나른해지는 듯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모녀처럼 보였다. 분명 생김새는 달랐지만, 그녀들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가족이란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중 한 여성은 젊음의 상징이었고, 다른 여성은 늙음의 상징이었다.
세 사람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잡음이 이곳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까 심히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코지라도 하는 줄 알고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긴장한 내가 무안해질 정도의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다. 늙은 여성은 가방에서 주먹밥을 꺼내 들더니 먹으라고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마침 허기가 몰려왔기에 그것을 받아 들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목이라도 막힐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가방에서 식혜를 꺼내 마시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입에 먹을게 들어가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더니 이것저것 물으며 내가 어울릴 수 있도록 선의를 베풀어 주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친절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들의 선의를 매몰차게 무시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의 선의를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뜻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곳을 내버려 두고 이야기만 하는 것은 이곳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위를 구경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들은 내 말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이었다.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땅을 밟고, 구경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 사람은 앞장서 길을 안내하고는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곤 했다. 저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돌계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슬슬 숨이 가빠질 즈음. 돌과 돌 사이에 동전이 하나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횡재다 싶어 동전을 빼내기 위해 몸을 숙여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빼낸 동전을 자세히 바라보니 세월의 흔적이 다분했고, 상징적인 문양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내가 모든 나라의 주화를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나라의 주화는 아니었다. 동전의 문양은 굉장히 이질적이었고, 남몰래 감춰 놓았던 욕망을 들추는 듯했다. 이 이상 바라보면 정신이 이상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전을 주머니 깊숙한 곳까지 처박아 놓았다. 그들은 동전을 보지 못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들에게 동전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며 이런 동전을 두 번 더 발견하게 되었다. 세 번째 동전을 빼내고 나니 이 정도면 일부로 놓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에 가고 있던 세 사람을 불러 세웠다. 동전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을까 해서였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이런 동전을 세 개 발견했는데,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손에 동전을 올려놓고선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더니 알 수 없는 신호를 날렸다. 그들 중 대표로 덩치 큰 사내가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올라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서둘러야겠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속력을 내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남자의 말대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의 형태도 보였다.
먼저 올라가던 세 사람도 사람의 형태를 발견했는지 발을 멈추고는 그쪽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형태는 말을 듣는 채도 안 하고 그저 계단을 내려올 뿐이었다. 형태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그 모습이 뚜렷해졌다.
피부가 태양에 그을린 듯이 까무잡잡했고, 윗옷의 행방은 알 수 없었으며, 흙으로 그림을 그린 듯한 낡은 농부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덩치는 곰이라 해도 믿을만했다. 그에게선 대체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의 악취가 바람을 타고 코를 괴롭혔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는데 그 속에 구더기들이 득실거린 다는 점이었다.
그를 쳐다만 보았을 뿐인데도 왠지 모를 살기와 함께 나에게 선의를 베풀 사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그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달래기 시작했지만 저 곰 같은 사내는 우리에게 다짜고짜 뛰어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하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자포자기한 찰나 누군가가 나를 밀었다. 그렇게 밀쳐진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곰과 부딪치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누가 도와줬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서둘러 올라가자고 말한 덩치 큰 사내가 보였다. 동시에 나에게 달려든 곰은 몇 차례 굴러 떨어지더니 얼마 안 돼 이상야릇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스라진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구토감과 환멸감을 선물해 주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는 그때 옆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고, 뿌리칠 새도 없이 그곳에서 동전을 하나 낚아채고는 곰이 죽은 곳으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남자는 죽은 곰 옆에 멈춰 서서는 가만히 아스라진 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선 그 빌어먹을 동전을 시체의 머리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또다시 나에게 선물을 주었고,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미하게나마 끝이 보이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나머지 둘도 나를 따라 올라왔다. 그렇게 도망친 미지의 장소에는 동양의 미로 가득한 집 한 채가 우리를 반겨 주었고, 우리는 급히 그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곳은 우리 셋이 있기에는 아늑했고, 넷이 있기에는 비좁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들에게 소리쳤다.
“대체 이게 뭡니까!”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정신이 없었다. 무서웠고, 생각하기 싫었다.
그녀들은 일단 진정하라며 나에게 다 설명할 것을 약속했다. 동전을 가져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춤사위를 멈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더 지나 내가 진정했다고 판단했는지 젊은 여성은 내가 아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그녀가 말하길 내가 뽑은 동전은 평범한 동전이 아닌 악귀를 봉인시키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한 행위로 인해 악귀들이 풀려났다는 것이다. 덧붙여 아직 끝난 게 아니며, 나머지 악귀들도 찾아올 것이라고 겁까지 주었다. 게다가 악귀가 찾아오면 아까 남자가 했던 것처럼 동전을 머리에 박아 넣으면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웃음이 절로 났다. 이 말에 동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황당무계한 이 상황이 내 상식선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그사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째서 나의 잘못을 탓하지 않는 건지, 남자는 어디로 간 건지, 여기는 어디인지, 당신들은 누구인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고, 물어보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하지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어야 할 벽에서 늙은 여성과 젊은 여성으로 추정되는 악귀가 스멀스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에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고, 악귀들은 나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뽐내며 공격해 왔다. 본능적으로 팔을 얼굴 앞면에 가져다 댔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 대신 나에게 온 것은 비명이었다. 아까까지 함께 있던 모녀가 악귀의 공격을 대신 맞아 준 것이었다. 젊은 여성은 하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늙은 여성은 다리가 무릎 아래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맞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했다. 순간 아찔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며 벽 쪽으로 몸을 숨기던 와중 내 귀에 비명과 함께 간절함이 들려왔다. 그녀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동전을 머리에 박아!”
그녀들은 생명을 불태우며 이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순간 손이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은 겁을 먹고, 의문이나 던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몸을 던진 그녀들을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동전을 한 손에 하나씩 집어 들고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용기와 기질을 발휘하여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의 형태를 한 악귀의 머리에 사이좋게 잊지 못할 선물을 건네주었다. 악귀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중 비명을 지르던 젊은 악귀는 재가 되어 형태를 잃어 가더니 검붉은 혈흔으로 변해버렸다. 시체도 뭐도 남지 않았다. 그저 검붉은 혈흔만이 사람의 형태를 띠며 바닥에 눌어붙어 버렸을 뿐이었다. 늙은 악귀도 그렇게 되었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니 늙은 악귀는 예상과는 다르게 반대편 머리로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빼내고 있었다. 그 기괴한 장면에 참지 못할 모멸감을 느꼈다. 나의 몸은 금세 모멸감으로 충만해졌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동전이 나오고 있는 악귀의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검붉은 혈흔만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실감이 들지 않아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곤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단잠을 깨우는 사랑스러운 인기척과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경찰들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 기뻐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손목 쪽에서 답답함과 아픔이 몰려왔다. 소리와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손목 쪽을 바라보니 차가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분명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해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봐버리고 말았다. 악귀의 눈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는 일이었다. 현실보다는 악몽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다시금 잠에 들었다. 이번에는 뼈를 때리는 차가움과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반겨주었다. 그곳은 독방이었고,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동전은 문 쪽에서 밝게 빛을 뿜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감정들과 악몽이 교차했다. 생각에 잠기며, 나를 이렇게 만든 원흉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손은 동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엔 그것을 집어 들었고, 그대로 내 머리에 박아 넣었다.
*
그렇게 죽은 줄로만 알았다. 평소 사후세계를 믿지 않던 나는 이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무의 영역이었다.
그런 무한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이가 단 한 명 있었으니 그는 거인이요, 동시에 신이었다. 거인은 거대한 옥좌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에는 거대한 검을 쥐고, 오른손에는 커다란 두개골을 받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발목에는 황금 발찌가 반짝였고, 그 아래로 누군가를 짓밟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의 크기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도 거인의 존재감을 대변해 주지는 못했다. 거인의 존재감의 원천은 머리였다. 거인의 머리는 한 개가 아닌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쪽 머리는 자고 있었으며, 오른쪽 머리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운데 위치한 머리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 개의 머리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눈이었다. 눈은 내가 전에 본 피와 같은 색이었다. 그 눈 속에는 지옥이 있었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악귀들이 보였다. 말 그대로 진짜 지옥이었다. 그런 거인을 보며 벌벌 떠는 사시나무도 있었고, 신을 숭배하듯 머리를 조아리는 광신도들도 있었다. 거인은 그런 그들이 시끄럽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서 입을 없애버렸다. 이제야 만족이라도 한 듯 거인은 가운데 머리에 달린 추악한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식을 가진 자는 죽는다.”
이 말에 사람들 중 절반은 눈웃음을 피었고, 나머지 절반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입을 움직였다.
“표식을 가지지 못한 자도 죽는다. 표식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것이다.”
이 말과 함께 사람들은 아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반응은 투명했기에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람들은 거인의 모호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나라고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저 거인은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참을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의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 듯 거인의 입꼬리는 귀에 걸리다 못해 찢어져 버렸고, 그것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저 웃음은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잠에 들면 악몽으로 미소를 띠며, 사라진 입도 함께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선사했다.
저 혐오스러운 웃음을 하고는 손가락을 몇 번 튕기더니 주변 사람들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몸은 다시 재생해 두 명이 되었다. 그렇게 분열된 몸 중 하나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머지 몸에는 머리 위로 밝게 빛나는 표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허무 그 자체였다. 그들 발아래로 그림자같이 짙은 어둠이 깔렸고, 하나이자 둘인 그들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짐과 동시에 원래 있던 입이 다시 생겨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원망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내가 거인이었다면 당장 내 귀를 없애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절망과 좌절이라는 납덩이를 짊어졌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누군가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내 귀에 꽂히는 단어 하나가 들려왔다.
“또 이 지옥을 반복할 수는 없어!”
반복이라는 말이 내 귀에 맴돌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구멍은 닫혀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난잡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나를 포함하여 서른세 명뿐이었다. 생존자들은 나처럼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 자들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들도 나뉘었다. 그런 생존자들 가운데 어둠으로 만들어진 사내는 후자에 속했다. 어둠은 내 쪽을 바라보더니 박수를 치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왔다. 뭘 축하한다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고 있던 거인의 왼쪽 머리가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머리는 하품을 크게 하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위에서 다시 아래로.”
그러고는 오른쪽 머리가 화를 내며 대꾸했다.
"아래에서 다시 위로!"
마지막으로 가운데 머리는 즐겁기라도 한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영원에서 다시 영원으로."
가운데 머리의 말과 함께 우리들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던 표식이 사라지더니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는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져 있는 세상이 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의 영역을 바라보았고, 거인을 바라보았고, 서른두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것들은 하나같이 시간의 나사가 빠져있었다. 그것들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위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문을 향해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의 품 안을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무렵 따뜻한 물이 머리에서 흘렀고, 누군가 나를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