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입구에서 연애를 마쳤다.

by 솔의눈꼽

겨울

그녀를 처음 만났던 당시를 몇 번씩 곱씹어서 그런지 그날은 많은 장면들이 풍경처럼 그려진다. 그녀는 겨울의 한기를 조금이라도 멀리하려는 듯 우아하면서 볼륨 있는 옷들을 주로 입었다. 그러면서도 카페에서 외투를 벗으면 무해한 웃음을 곧잘 지으면서 재잘거렸는데 옷차림에 대비되는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 겨울의 절정을 넘어선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다채로운 일상과 취미를 가졌고 나도 해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테이블 위에 명품 지갑과 차 키만 안 올렸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작디작은 의욕을 한껏 부풀려 허세를 떨었던게 아닌가 싶다. 정말 의욕이 있었더라면, 지금 무엇 하나라도 꾸준히 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겨울은 내가 처음만난 그녀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게 도와주고 지나갔다.


연인과 더 멀리 골목골목을 누비고 싶은 마음은 운전을 배울 때의 수고로움, 걱정들을 훌쩍 넘어섰다. 예쁜 카페 앞에서 웨이팅을 하는 것도, 데이트 일정이 꼬이는 것도 단둘이 붙어서 헐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벤트 같았다. 그녀는 계절이 새겨져있는 것처럼 날이 따뜻해지는 만큼 더 쾌활해졌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생기는 상념들은, 연애의 생동감에 쉽게 밀렸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많은 걸 느끼고 감동받게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과분할 정도로 고마웠다. 산뜻한 봄, 나는 유쾌한 연애를 즐겼고 봄나들이 몇 번에 운전 실력도 늘었다.


여름

내 커리어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연인과 어떻게, 얼마나 공유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 채 결정을 내렸다. 사실은 우리 둘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이후에 우리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게 틀어진 것을 인지하면서도 나는 애써 모른 채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마저 줄면서 우리의 대화에 겉치레만 남은 느낌이 강해졌다. 알맹이들은 가슴에 얹힌 것처럼 무겁게 뭉쳐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만만 튀어나왔다. 우리는 서로를 빙빙 돌면서 시간만 흘려보냈다. 우리의 관계는 여름처럼 지난하게 늘어지기만 했다.


늦여름

그녀와 나는 첫 만남처럼 카페 2층에 마주 앉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어려웠다. 우리는 진지하게 대화하다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웃음도 지었다. 누구 하나 크게 잘못했거나 대판 싸워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건지는 모른다. 이별을 받아들였을 때, 이번만큼은 서로 늘어지는 것 없이 쉽게 자리를 끝냈다. 마지막에 눈물이 차올라서 급하게 일어선 것도 같다. 아무튼 우리는 헤어졌고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아직 가을 냄새는 풍겨오지 않았다. 우리는 가을의 입구에서 연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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