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뉴욕을 향하여

by 김성민


장기여행 캐리어를 샀다. 29인치. 무게 4킬로그램. 큼지막한 가방이 한 손으로 가뿐히 들렸다. 알루미늄 소재 가방이 튼튼하다고 하길래 찾아봤더니 생각보다 묵직했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 휠이 있더라도 짐이 가득 담기면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질 것 같아 이왕이면 기본 무게가 덜 나가는 가방으로 사고 싶었다. 며칠 전 택배로 가방이 도착했다. 이렇게 큰 가방을 샀나? 흠칫 놀라면서 상자를 열고 가방을 꺼냈다. 안방 한쪽에 가방을 활짝 펼쳐놓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4인 가족 짐이 아닌 나의 한 달 치 짐을 싸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존에 있던 캐리어 두 개는 아이들이 사용한다. 한 달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짐을 꾸리려면 넉넉한 가방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각각 하나씩 사용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한 달간 집을 떠난다는 것, 썸머스쿨에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것도 처음이다. i는 자신이 처음 맞닥뜨릴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기대 반 걱정 반인 표정으로 ‘음. 그러니까 룸메이트랑 같은 방을 쓴다는 거지?’


아이들이 가는 C 학교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에 위치한 곳으로 뉴욕에서는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코네티컷은 서울보다 20배 이상 넓은 곳이라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동생이 다녔던 중고등학교도 코네티컷에 있었다. 동생의 겨울방학과 졸업식 이후로 20여 년 만에 가는 그곳, 코네티컷은 나에게 화창한 계절의 졸업식보다 추운 겨울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인구밀도가 낮아서 사람이 드물고 흰 눈으로 덮여있던 언덕과 나무들을 창문 밖으로 건너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여름 한가운데의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여름 나무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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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기숙사에 보내고 다음 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뉴욕에 남아서 지내기로 했다. 한 달 간 혼자 뉴욕에서. 그는 처음에 여러 이유를 들어 나의 뉴욕 체류를 반대했다. 뉴욕 물가가 어떤지 아느냐. 혼자서 밥도 잘 안 챙겨 먹으면서. 뉴욕이 얼마나 위험한데. 요약하면 그의 정확한 워딩은 이것이었다. ‘노숙자 되려고?’


극현실주의자 눈에 비친 나는 극이상주의자였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도 스톱워치를 쓰며 정확성을 추구하는 그에게 나의 느슨한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요 말도 안 되는 ‘난센스’였다. 그와 17년간 살고 있는 나는 당연히 그의 반대를 예상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미국 현지 사정에 나보다 밝으므로 그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말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8월에 돌아오겠노라고 말했다. 혹시 모를 비상시를 대비하여 남아있겠다고. (물론 비상시는 없길 바라지만) 결국 그가 나의 말을 수용한 것은 오래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만회하기 위한 결정이리라,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시도하게 된 나 홀로 뉴욕 한 달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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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집을 비우는 기념으로 책장 앞 바닥을 점령하고 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뉴욕 관련한 책들을 한쪽에 모아두었는데 뺄 책이 많지 않았다. 모든 책을 가져가고 싶은 어리석음이 나를 괴롭힌다.


뉴욕의 작가들


한나 아렌트의 주요작이 뉴욕에서 쓰였다. 아렌트가 가르치고 생활하고 묻힌 곳을 가볼 생각이다. (계획은 그렇다.)


『필경사 바틀비』의 허먼 멜빌

『뉴욕 3부작』의 폴 오스터

이디스 워튼의 『올드 뉴욕』

『위대한 개츠비』의 스콧 피츠제럴드

뉴욕에서 머물 숙소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뉴욕에서 처음 머물렀던 숙소와 가깝다고 하여 은근히 기대 중이다.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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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 후면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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