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의『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1917-1985)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라고 말했다. 팸플릿이라니,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문학작품이 아니었던가? 뵐은 160페이지 남짓한 이 책을 왜 의견을 피력하는 책자, 팸플릿이라고 명명했을까. 허구가 아니라 경험과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서. 현실과 무관한 텍스트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 이어서다. 소설이기를 거부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하인리히 뵐이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1974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문장이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한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이로써 뵐은 우익 언론 <빌트> 지를 저격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일방적 보도 방식으로 사람들의 명예를 짓밟는 보도 행태에 대해 뵐은 작정하고 고발한다. 거짓 프레임(색깔론)을 동원하여 거짓을 사실로 만들고 사실을 왜곡하는 행태를 뵐은 언론의 폭력이라고 보았다. 보이지 않는 폭력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내고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뵐은 실감 나게 보여준다. 책의 부제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인 이유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읽기는 마치 흩어져있는 퍼즐을 맞추는 것 같다. ‘카타리나 블룸 사건’이라는 그림을 맞추기 위한 퍼즐. 퍼즐의 전체 그림을 알고 다시 돌아가서 보면 처음에 낯설게 보였던 퍼즐 조각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게 된다. 그림은 경찰과 언론 <자이퉁>의 작품이다.(<빌트>가 곧 <자이퉁>) 그림에 맞추기 위해 사실이라는 퍼즐은 조작되고 왜곡된다.
성실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프리랜서 가사 관리인 카타리나 블룸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불행한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립적으로 삶을 꾸리는 씩씩한 여성이다. 카니발 기간에 열린 댄스파티에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고 파티가 끝나고 블룸은 자신의 아파트로 가서 괴텐과 사랑을 나눈다. 남자를 쉽게 만나지 않는 카타리나에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만큼 사랑을 만났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괴텐이 탈영과 횡령죄로 경찰 수배 중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카타리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범죄자를 은닉했다는 죄목으로 카타리나가 사는 아파트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카타리나는 연행되어 수사받는다. 과도한 심문으로 카타리나의 삶은 ‘탈탈’ 털린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카타리나의 신상이 그대로 노출이 되며 신문 <자이퉁>은 선정적인 방식으로 보도한다. 1면 헤드라인에 카타리나를 ‘살인범의 정부’ ‘음란한 이혼녀’로 둔갑시킨다. 황색언론이 그려놓은 카타리나 이미지에 따라 기사의 방향을 정해놓고 퍼즐을 짜 맞추듯, 경찰이 흘린 정보를 변형하여 그림을 완성한다. 카타리나는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라는 말로 왜곡된다.
<자이퉁> 기자 퇴트게스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찾아내어 무리한 인터뷰를 감행하고(그 여파로 어머니 사망) 전 남편의 (원한품은) 인터뷰는 카타리나를 돈에 눈이 먼,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만든다. 휴가를 반납하며 성실하게 쌓아 올린 삶은 한순간에 은행 강도단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매도당한다. 그렇게 카타리나가 공들인 모든 평판과 명예를 잃어버린다. 단 나흘 동안에.
대중에게 한번 찍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경찰 수사와 언론이 유착하여 들어낸 폭력 앞에 한 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블룸의 신상을 밝히지 않고 ‘전혀 결함 없는 사람이 불운하게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도하는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은 너무 작다.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카타리나가 외치듯,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카타리나 블롬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그동안 신의를 쌓았던 카타리나에게 도움을 주는 주변 인물들이 있지만 역부족이다. 그들마저도 <자이퉁>의 공격에 같이 매도당한다. 명예를 쌓아 올리기는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신문기자의 이런 끔찍한 ‘무지’, 그렇다, 거의 아무것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의 무지함이 카타리나로 하여금 권총을 뽑아 들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런 ‘무지한’ 비열함이 그녀를 완전히 파멸시킨 것이 틀림없다. (150쪽)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녀는 극도로 양심적인 여자다. (152쪽)
카타리나는 자신의 삶을 짓밟은 <자이퉁> 기자 퇴트게스를 향해 총을 쏜다. 발사한 총은 퇴트게스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거짓을 아무렇지 않게 사실인 양 받아들이는 세상을 향한 억울함과 분노가 아니었을까. 밤늦게 걸려온 익명의 음란전화와 모욕적인 편지들 그리고 뉴스를 보고 제멋대로 믿어버린 사람들의 시선들. 울분, 분노, 억울함이 쌓여있던 카타리나에게 퇴트게스가 던진 ‘나랑 섹스 한탕할까?’ 라는 무지하고 비열한 말은 카타리나가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결정적 한마디였다.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으며 평범하게 살던 그녀, 카타리나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과정이다. 카타리나는 도망가지 않고 순수히 자백한다. 삶을 알뜰히 꾸려가던 여성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언론과 정부의 거대한 압력에 맞서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권총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취해야 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여기서 카타리나의 행동에 정당성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인리히 뵐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카타리나가 감옥에서 나온 후 괴텐과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인리히 뵐 식 희망이다.)
오늘날 카타리나 블룸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보통 사람이 사실과 거짓을 일일이 검증하기 어렵고 특별히 관심 있는 이슈가 아닌 이상, 그것이 사실이려니 받아들인다. 그렇게 진실은 왜곡된 채 남는다. 클릭 수를 유도하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 제목으로 낚고 클릭을 해서 열어봄으로써 기사에 낚인다. 온라인 시대 뉴스가 소비되는 방식이다. 언론의 생태계를 바꾸는 열쇠는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있다. 여러 SNS을 통해 스스로 생산자가 되는 시대에 투명성과 사실 확인은 더 중요해진다는 걸 환기해준 작품이다.
영화와 문학 사이
문학작품을 즐겨 영화로 만들었던 폴코 슐렌도르프와 그의 부인 마가레테 폰 트레타 감독이 만든 영화 <카타리나 볼룸의 잃어버린 명예>.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 순으로 진행된다.
카타리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과 전혀 무관한 질문들이 오고 간다. 소설 주인공이 스물일곱 미모의 가사관리사가 아니라 오십대 남자 교수였다면, 그토록 집요하게 사적인 질문을 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