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간의 기록 Oct 12. 2022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오만과 편견』 다음으로 출간된 『맨스필드 파크』는 제인 오스틴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식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내용을 멋대로 실제 삶과 연관 짓게 만든다.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제인 오스틴은 어머니와 언니 카산드라와 함께 친척과 친구 집을 전전하게 된다. 나중에 햄프셔 초튼 집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매년 연달아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안정된 공간이 제인 오스틴에게 얼마나 중요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들 틈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쓰던 글을 감추었던 오스틴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햄프셔 쵸튼, 제인 오스틴의 집. 제인 오스틴의 주요 작품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친척집을 전전한 경험이 『맨스필드 파크』에 녹아져 있는 것만 같다.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는 열 살이 되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친척 집에 보내진다. 패니의 엄마 프라이스 부인과 이모들의 일방적인 결정적이었다. 가난한 살림으로는 도저히 아홉 남매를 감당할 수 없었고 술만 마시는 남편을 볼 때 생활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이스 부인에게는 남작과 결혼하여 유복한 언니 버트럼 부인이 있었으니, 도움을 청할 수가 있었다.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은 버트럼 가문이지만 중간에서 모든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나서기 좋아하는 큰 언니 노리스 부인이다. 언니들은 맏딸 패니를 아예 맡아 키우기로 하면서 가난에 허덕이는 동생의 양육 부담을 덜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패니는 고향 포츠머스를 떠나 이모들이 있는 맨스필드 파크로 가게 된다. 



대저택 맨스필드에 도착한 패니는 동쪽 다락방에 배정받는다. 한 번도 난롯불이 켜지지 않은 채 방치되다시피 하지만 패니에게 소중한 ‘자기만의 방’이 된다. 고향 집 포츠머스에서는 다락방조차 없었으니까. 방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어릴 때부터 입주 가정교사에게 체계적 교육과 교양을 배운 사촌 언니, 마리아와 줄리아와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노리스 부인은 (패니와 마찬가지로) 버트럼 가의 직계 일원이 아니지만 당당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분을 주장하며 맨스필드 파크에서 군림하는데, 누구보다 노골적으로 조카 패니를 외지인 취급하며 타박한다. 어리고 연약한 패니는 이모 노리스 부인의 촘촘한 구박을 항의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받아내지만, 다행히 패니를 보호해주는 사촌오빠 에드먼드가 있다. 에드먼드는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패니를 여동생으로 아끼며 진심으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패니는 에드먼드가 보여주는 애정과 우애를 바탕으로 맨스필드에 차츰 적응해 나간다.      



영화 <맨스필드 파크> (1999)



에드먼드의 우애는 패니가 포츠머스를 그리워하는 유일한 이유, 오빠 윌리엄과의 우애를 대체한다. 패니는 멘스필드에서 원하지 않는 더부살이를 하게 되지만, 생각해 보면 패니가 고향 포츠머스를 진정으로 있을만한 곳으로 여겼는지는 의문이다. 부모가 적절한 관심을 주기에는 너무나 빠듯한 삶이었으니까. 열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맨스필드 파크에서 보내는 삶은 패니가 자신이 위치할 곳을 찾는 자리 찾기다. 원가족에서 벗어나 입양되다시피 한 친척 가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자 환대받지 못했던 패니가 맨스필드 파크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는 과정이다. 소극적이고 주목받기를 두려워하는 패니의 위치가 어떻게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지 보여준다.     



패니의 연약함과 소극성은 런던에서 온 크로퍼드 남매와 대비된다. 헨리와 메리 크로퍼드 남매는 부유한 상속자이자 런던의 최신 유행을 습득한 세련된 매너를 갖춘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흐르는 조용한 시골 맨스필드 파크에 외부에서 온 매력적인 인물들의 등장은 반길만한 사건일 수 밖에. 사교계 경험이 풍부한 헨리는 어렵지 않게 이미 약혼한 마리아와 줄리아 자매의 마음을 흔들고 에드먼드 역시 활달하고 명랑한 에너지를 지닌 메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젊은이들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흐르는 가운데 에드먼드의 관심이 분산되면서 패니는 자주 혼자가 된다.      



크로퍼드 남매 




패니가 타던 말을 메리가 빌려 타게 된다거나 소풍처럼 가게 된 저택 방문 산책에서 패니는 뿔뿔이 흩어지는 인물들 속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는다.’ 혼자 남는 패니는 자의적 타의적으로 맨스필드 파크의 면밀한 관찰자가 된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맨스필드 파크의 안주인 레이디 버트럼의 나태한 무심함과 달리 조용하지만 영리한 패니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나름의 생각을 출력하여 마음속에 저장해 둔다. 패니가 받은 눈칫밥은 사리 분별의 토대가 되고 맨스필드 파크를 운용하는 질서와 규칙을 습득하면서 패니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을 키운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이 패니에게 배움의 장이었다.           



버트럼가의 가장 토마스경은 맨스필드 파크를 유지하는 질서이자 원칙이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가부장적인 토마스 경이 서인도 제도 안티과로 가면서 그의 장기적인 부재에서 자녀들은 해방감을 느낀다. 문란한 연극은 도덕적 질서를 무시해도 용인되는 세계였으며 연극을 핑계로 방종의 자유를 맛본다. 반면 연극을 위해 모두가 우르르 몰려갈 때 혼자 남게 되는 패니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패니는 소극적이고 비활동적이지만 그러한 모습을 지탱하는 이면에는 적극적 인내와 신중함이 있었다.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보다 외부에서 습격하는 심리적 친입(노리스 이모의 지치지 않는 구박과 타박, 에드먼드의 메리에 대한 눈먼 애정, 헨리의 애정 공세, 토마스 경이 가하는 원하지 않는 결혼 종용)을 방어한다. 방어의 무기가 되는 분별력에 대한 믿음은 패니가 패니 자신일 수 있도록 지켜준다.           



패니와 토마스 경 



맨스필드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고 고향집 포츠머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패니는 알게 된다. 자신이 더 이상 고향 포츠머스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남자들은 모두 거칠어 보였고 여자들은 주제넘어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천박해 보였다.’ 열여덟이 된 패니의 눈에 포츠머스는 ‘무관심과 잘못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근사한 서재가 있던 맨스필드 파크와 달리 포츠머스 집에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패니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자격을 갖춘 존재가 됐다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또한 모든 일에서 자신의 행동을 알아서 하고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그렇게 했다. 책을 빌릴 수 있는 회원이 되고 책 선정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나니! 더구나 그런 선정을 통해 다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다니!’      



미약했던 패니의 존재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사촌 언니들은 대책 없는 사랑의 도피로 버트럼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장남 톰은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맨다. 맨스필드 사람들 에드먼드와 레이디 버트럼은 패니를 그리워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패니가 맨스필드 파크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패니 역시 오래전부터 포츠머스가 아닌 맨스필드 파크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기에 이른다.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는 토마스 경의 신임과 애정으로 패니가 포츠머스에서 맨스필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분별력 있는 여동생 수전과 함께.           



그동안 메리 크로퍼드에게 마음을 빼앗긴 에드워드를 지켜보는 패니는 답답했다. 왜 그는 모를까. 메리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오빠의 눈을 뜨게 할 수 없을걸. 그 무엇으로도, 그토록 오랫동안 진실이 눈앞에 뻔히 드러나 있었는데도 아무 소용없잖아’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메리의 민낯을 확인하는 순간, 에드먼드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마법이 풀린 거야. 내 눈이 번쩍 뜨였어.’          

 


에드먼드의 눈이 뜨이면서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던 패니를 향한 시선이 바뀐다. ‘우애가 부부로서의 사랑의 충분한 토대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드먼드에게 패니가 정신적 우월성을 지닌 존재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마치 예정된 결론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하여 패니는 자신을 구박했던 노리스 부인과 위치가 역전되는 것은 물론 동쪽 구석 다락방의 연약한 소녀에서 맨스필드 파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된다.          




패니와 에드먼드. 에드먼드는 글 쓰는 패니를 격려하는 유일한 사람 






영화와 문학 사이 




패트리샤 로제마 감독의 영화 <맨스필드 파크>(1999)는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가 아니라 감독 자신만의 맨스필드 파크를 만들었다. 연약한 주인공 패니를 씩씩하게 말 타는 인물로, 바느질하는 패니가 아니라 글 쓰는 패니로 바꾸었다. 오빠 윌리엄과의 우애를 여동생 수전과의 자매애로 바꾸었고 헨리의 청혼을 하루 만에 번복하는 장면을 넣었다. 바뀐 장면은 패니가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에 가깝다. 로제마 감독은 패니와 제인 오스틴을 겹쳐놓음으로써 맨스필드 파크보다 맨스필드 파크를 쓰는 제인 오스틴을 이야기한다.      




글 쓰는 어린 패니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감독의 권한은 어디까지일까? 캐나다 여성 감독이라는 정체성을 반영하여 서인도 제도 안티과에서 토마스 경이 저지른 일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노예를 잔인하게 다룬 과거에 의도적으로 눈감고 싶은 제국주의 영국의 모습은 버트럼 부인이 약에 취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영화 <맨스필드 파크>는 소설이 말하는 것을 바꾸거나 축소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확대한다.   


 

가령, 영화에서는 '새 테마'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새 ‘찌르레기’에 관한 대화는 헨리와 패니 사이에서 나오는데 소설에 없는 장면이다. 헨리가 낭독하는 대목, 새장에 갇힌 찌르레기가 “나갈 수가 없어”라고 운다.  여기서 새장 속 찌르레기는 이모네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패니의 처지와 닮았다. 



영화 마지막에 사경을 헤매던 장남 톰에게 아버지 토마스 경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이 대목 역시 소설에 없는데 톰이 도덕적이고 근엄한 아버지가 식민지 안티과에서 저지른 일을 보고 환멸을 느낀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미안하다고 한 것.)  오래 묵은 부자 간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창밖에 훨훨 날아가는 새들을 카메라가 비춘다.       



옆에서 새들이 후드득 날아가는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패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맨스필드 파크에 있는 자신을 여전히 새장 속 찌르레기로 여겼을까. 아니면 새장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는 새들을 자신의 미래로 여겼을까.      



에드먼드와 이루어진 사랑으로 패니는 더이상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아닐 것이다. 




이전 19화 상상과 현실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