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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28. 2022

터져나오는 목소리들

필립 로스의 『울분』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필립 로스가 타계한 해는 2018년. 부고 소식을 듣고 그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으니, 나에게 필립 로스와 죽음 이미지는 그렇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작품 『네메시스』를 끝으로 절필하기 전까지 31편의 소설을 쓴 다작의 작가, 필립로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가 소설 쓰기 뿐 아니라 삶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태도로 보이는 이 말은 필립 로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단서가 된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는 모습이 소설 속 인물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연히 떨치고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다스려져야 할까. 이를테면 욕망. 



‘제가 들은 바로는 욕망이 조금씩 사라져버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끔찍한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필립로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곧 필립 로스 자신이다. 그에게 욕망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욕망이 사라져가는 걸 최대한 늦추거나 막아야 한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가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의무와 조금씩 사라져버릴지라도 여전히 펄떡거리는 욕망 사이에서 쓰는 사람. 내가 읽은 필립로스의 모습이다. 의무와 욕망의 낙차에서 오는 에너지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있다.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자주 분노로 표출된다. 말하자면 필립로스를 추동하는 에너지는 분노의 에너지. 



필립 로스가 75세 되던 해 발표한 소설 제목 『울분』의 원서 제목은 『인디그네이션 indignation』. 분개, 분함이라는 뜻을 지닌 인디그네이션이 울분으로 번역되었다. 답답하고 분한 마음. 사전에서 울분을 정의하는 말이다. 소설을 지배하는 정서인 울분은 소설 속 인물들이 지닌 울분이며 울분은 여러 형태로 분출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열아홉 살 화자이자 주인공은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답답하고 분하게 만들었을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기 마커스 매스너는 대학에 입학한다. 유대인 정육점 집 아들로 자란 그는 가족과 사촌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여 집안의 자랑이자 부모님의 자부심이 된다. 전 과목에서 A를 받을 만큼 성실한 학생이며 아버지를 따라 도축된 고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착실한 아들이다. ‘남은 힘을 모아 피를 긁어내야 정육점을 정결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결코 좋아한 적 없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자 교훈이었기 때문이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



아마도 마커스는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불필요한 감상이나 감정을 경계하고 나태함을 통제하며 부지런히 살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차이는 언제나 있는 법. 이제 마커스는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원했다. 정육점 일을 모두 배웠지만 피를 좋아하지는 못했으므로 되도록 피의 삶에서 멀어지고자 법률가를 목표로 삼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비이성적으로 아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려 드는 아버지를 마커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충분히 할 만큼 했는데 아버지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이 억울했다. 이제 아버지는 나를 믿어도 좋지 않은가? 무엇을 더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마커스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 오하이오로 학교를 옮긴다. 일단 집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억압과 통제의 탈출구가 대학이었다. 하지만 대학은 그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배정받은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킨다. 버트런드 러셀의 무신론을 신봉하는 마커스는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채플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 환경에 순응했던 마커스는 대학에서 부적응자가 된다. 그는 울부짖는다. 



아버지를 따라 성실하게 정육점에서 일을 배웠던 마커스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역겹고 하기 싫은 일을 참아냈던 마커스는 왜 룸메이트의 무관심한 침묵이나 기이한 행동에는 조금도 참지 못하고 욱하면서 맞섰던 것일까? 정육점에서 피를 제거하며 일을 배우던 인내심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인내심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어서 이제 마커스에게는 더이상 허용할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대학은 마커스에게 혼란의 연속이다. 흠모하던 여학생 올리비아와의 첫 데이트에서 마커스는 충격을 받는다. 올리비아가 보여준 대담한 행동에 마커스는 혼란스러워 도망치려 하지만 올리비아에게 끌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 마커스에게 올리비아는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였다. 올리비아는 하고 싶은 것을 참지 않는다. 일탈적 행동이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올리바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건 어머니가 말한 ‘인생의 덫’이자 아버지가 말한 ‘발을 헛디디는 행동’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올리비아를 판단하면 할수록 자신 안에 스며든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억압하고 규제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바로 아버지였다.’ 



영화 <인디그네이션>(2016)



대학에 왔으나 여전히 여러 규제들로 학생들을 구속하려는 학교(학장) 분위기는 마커스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울분의 이유가 된다. 집단적으로 터져 나온 일탈적 행동은 전통적인 학교 분위기를 비웃듯 순식간에 번진다. 부적응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은 학교는 그들을 가차 없이 내쫓는다. 마커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부모의 두려움은 마치 불길한 예언처럼 마커스에게 드리워지고 마커스의 터져나온 울분은 그를 전쟁이라는 피의 전장으로 내몬다. 그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피의 삶으로. 



유대인 부모는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자녀를 정결하게 키웠으나, 자녀 세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쟁이었다. 마커스의 부모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하나뿐인 아들을 보호하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최악의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필립 로스는 소설 끝에 ‘역사와 관련된 메모’를 덧붙이며 그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학생들의 폭동은 20주년을 기념하며 다시 반복되며 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학생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시대가 변하여 학생들을 규제했던 구속과 규칙이 폐기된다. 채플도 하룻밤 사이에 폐지되었다. 마커스가 조금 더 늦게 태어났거나 조금더 빨리 변화가 일어났다면, 마커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완화된 규칙과 규제 속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울분은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인생이란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영원한 비극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예언처럼 펼쳐지는 삶. 필립로스가 그리는 청년의 삶이다. 그에게 젊은 시절이란 결코 낭만이 아니었다. 끝없는 투쟁, 억압에 맞서는 분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대를 향한 울분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왔을까? 그 시대를 가까스로 건너온 노작가가 피 흘린 청춘을 대신하여 울부짖는 것만 같다.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 <인디그네이션>은 마커스와 올리비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물론 소설에서도 두 사람의 만남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영화에는 룸메이트와의 에피소드가 축소되었고 학교 폭동(와인스버그대학의 팬티습격사건)과 같은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 의도적인 생략은 반대로 의도적인 첨가가 있다는 것.  



영화는 소설과 달리 나이든 올리비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전장에 있는 마커스의 얼굴로 넘어간다. 이어지는 마커스의 독백. ‘사람은 죽고 나면 생전에 했던 사소한 결정을 다 기억할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기억할까? 난 다 생각난다. 난 그들에게 말한다. 영원히 말한다.’



마커스의 독백과 대응되는 소설의 문장. ‘지금 나는 죽은 상태이고, 죽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 않은 화자는 모르핀을 맞고 무의지적 기억을 말한다. 마커스가 있는 곳은 '기억이 전부인 곳이었다'. 죽기 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억이 소설(영화)의 내용이다. 



영화는 마커스의 슬픔을 어루만지려는듯, 마커스의 외로운 외침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왔듯 마지막에도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마커스, 너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어. 그러니까 슬퍼하지마. 라고 말하듯 미소를 지으면서. 마커스의 기억은 중단되지만 올리비아가 마커스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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