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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29. 2022

인생의 얼룩에 대하여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아테나 대학에서 고전을 가르치는 콜먼 실크는 영웅이자 신화적 존재다. 시대에 뒤처지고 침체 되어 있던 대학을 떠맡아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는 인물. 20세기에 걸맞게 대학을 부흥시킨 ‘콜먼은 대학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던 것만큼이나 지역사회도 크게 변화시켜놓았다’



콜먼 실크가 재직한 대학 이름은 그리스 아테나(Athens)를 연상시키는 아테나Athena. 게다가 그는 그리스 고전을 가르치는 고전학 교수. 필립 로스는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이 소설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콜먼 실크 버전이에요.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그 운명을 맞아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영웅말입니다.



콜먼 실크가 추락하는건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 두 학생에 대해 아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나요. 아니면 유령spooks인가요?’ spooks.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학생이어서 본 적이 없다는 의미로 쓴 단어였는데 우연히도 그 학생들이 흑인이었던 것이다. spook 에 흑인 비하 표현이 있다는 이유로 콜먼 실크는 곧바로 징계를 받는다. 그는 순식간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그는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지만 단 한사람도 그를 위해 변호하거나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의 적들이 벌인 일이었을까. 그는 아테네 대학을 구한 영웅이었지만 불가피하게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가 직접 임용한 교수도 그를 외면하다니 이건 뒤에서 칼을 꽂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대학을 떠나기로 한다.



그는 단지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가차 없이 매장당한다. 그가 대학에 복무한 시간은 한순간에 무시되고 그가 이룬 업적과 성취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충격의 여파로 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의 분노는 주체할 수 없이 커진다. spooks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당한 일을 쏟아내는 분노의 글쓰기를 하는데 잘 진행되지 않는다. 감정이 격렬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네이선 주커먼을 만난다. 콜먼 실크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며 주커먼을 다짜고짜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이자 관찰자 소설가로 등장하는 주커먼이 나중에 콜먼 실크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된다. 『휴먼 스테인』이라는 소설을.



'휴먼 스테인'을 우리말로 하면 인간의 오점. 콜먼 실크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이것이다. 자신의 비밀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없었다.



 spooks사건은 유태인 백인 교수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기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지만, 실상은 그가 유태인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다는 것. 고교시절 수석을 할 정도로 똑똑하고 권투 실력도 뛰어났던 콜먼 실크. 외모도 준수했던 그는 집안에서 사랑받는 둘째 아들. 그는 완벽했다. 그가 흑인이라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콜먼이 원하는 것. 어린 시절부터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다. 흑인으로도 심지어 백인으로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으로 자유롭게. (193쪽)



그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점을 지우기로 한다. 흑인이 아닌 백인으로 살아가기로. (그것이 가능할 만큼 그의 살결은 하얗다.) 그는 흑인으로서의 운명을 피하고자 한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신화 속 인물처럼.



오점을 공격하는 세상의 펀치를 피하자. 인생이라는 링위에서 콜먼은 펀치를 휘두른다. 오점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과 비밀. 영웅에게는 비밀이 있어야 한다. 비밀이라는 갑옷을 입으며 콜먼은 대담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정체를 숨긴다.  자유라는 가슴 벅찬 관념을 위해 가족과 절연하고 어머니를 외면한다. 그런 콜먼을 보며 엄마는 말한다. '넌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지만 생각은 노예처럼 해'  



하지만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흑인이라는 펀치가 그를 다시 공격했으니 말이다. 인종차별을 당했던 자가 인종차별로 고발을 당한다. 마치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그 운명을 맞이해버린 오이디푸스왕처럼. 그가 지우려 했던 오점은 그의 명예로운 업적에 오점을 남긴다. 오점을 감춘 대가, 자기 자신을 속인 대가, 비밀의 대가일까 ?



이 모든 일은 미국 1998년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은 빌 클린턴의 스캔들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대통령의 성기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삶이 그 파렴치한 추잡함으로 다시 한번 미국 전역을 뒤흔들어놓은 계절’ 이자 ‘자기만 성자인 척하는 감정적 도취가 부활한’ 알 수 없는 광기와 흥분이 점령한 시기이다. 그러한 광기를 콜먼 실크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와 겹쳐 놓는다. 대학을 스스로 그만둔 콜먼 실크는 아내를 잃고 직업을 잃은 일흔 살의 남자. 이제 더 추락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모험을 한다. 포니아 팔리. 포니아는 나의 ‘마지막’이야.  전 대학 학장과 글을 모르는 대학 청소부 여성과의 관계는 스캔들이 되기 충분하다.



인종차별주의자로 얼룩진 그의 이력은 이제 더이상 돌이킬 수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필립로스는 묻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듯 떠들지만, 실상 알고 있나요? ‘spooks’한 마디만 보고 그를 고발했듯이 그의 사생활도 그렇게 보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 소설은 묻는다. 당신에게는 어떠한 오점도 없나요?  



우리는 오점을 남긴다. 우리는 자취를 남기고, 우리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학대, 실수, 배설물, 정액-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할 방법이 없다.  (...) 우리 인간은 불가피하게 오점을 지닌 존재라는 것.  (2권, 70쪽)



씻을 수 없는 오점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정화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오점이 불가피하고 태생적이라면 그 오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휴먼 스테인』이 묻는 질문이자 다른 사람의 오점만 보는 사회를 향한 묵직한 목소리로 들린다.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 <휴먼 스테인>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일흔 한 살의 콜먼 실크를, 니콜 키드먼이 서른 넷의 포니아 팔리를 맡았다. 소설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지점이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었지만 영화는 소설의 빈 부분을 메우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설득력을 얻기 힘든 관계는 영화에서 두 배우의 연기와 분위기에 의해 지탱된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얼음낚시 장면은 소설에서 ‘정화 의식’에 해당한다. 콜먼과 포니아를 간접적으로 죽인 포니아의 전 남편 레스 팔리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장소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정화되었다는 듯이. 레스 팔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오점으로 여겼고 오점을 제거했으므로 자신의 행동은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불안해 보일 뿐이다. 점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또다른 얼룩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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