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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Sep 28. 202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

『나를 보내지마     

 

2017년 스웨덴 한림원은 가즈오 이시구로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그가 작품에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자기기만’이라고 말했다. 시간에 따라 기억은 어떻게 변형되며 재해석되는지 혹은 왜곡되는지, 이시구로는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기억이 갖는 의미를 파헤친다.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진실 앞에 화자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나’로 시작하는 화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화자와 동일시되는데 화자가 왜곡된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할 때, 독자는 마냥 주인공 화자를 옹호할 수가 없게 된다. 


 

『남아있는 나날』의 영국 집사 스티븐스가 그러했다면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하는 캐시 H가 있다. 스티븐스가 보여준 충성심과 그가 믿었던 품위의 가치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쉽게 마음을 거둘 수 없듯이, 캐시 H가 인간이 아닌 장기 이식을 위해 탄생한 복제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캐시로부터 쉽게 거리를 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캐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복제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 혹은 우정의 트라이앵글     



캐시가 기숙학교 헤일셤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읽다보면 학창시절에 겪은 ‘우정과 사랑’이라고 뭉뚱그리기에는 보다 복잡한 감정의 결이 그 시절에 있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헤일셤은 장기 이식을 할 (복제된)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이지만 그러한 목적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어서 보통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헤일셤은 학교인 동시에 고향이자 집과 다름없는 곳. 클론인 그들에게 부모가 없으니,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이 가족의 자리를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다.      



때문에 캐시와 루스, 토미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기가 어렵다. 다툼과 화해, 갈등과 반목, 사랑과 애정을 나누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관계. 그들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미워하고 사랑한다. 스킨쉽으로 애정과 우정을 표현하거나 사소한 버릇과 행동으로 서로의 기분을 감지할 줄 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하며 친밀하다. 친밀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양한 얼굴을 본다는 것. 얼굴이 말하는 표정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다.      




마크 로마넥 감독의 영화 <네버 렛 미 고>(2011)에서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 



루스와 토미가 공식적으로 연인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캐시와 토미 사이에 나눈 감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루스와 캐시가 나누는 우정은 ‘낮 동안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었다 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변함없이 매트리스에 앉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속내를 털어놓는’ 성격의 우정이다. 루스의 변덕을 받아주는 캐시의 천성적인 너그러움도 있겠지만 어쩌면 가족 같은 관계여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친구라는 자리에 자매나 남매라는 이름을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들은 가깝다. 애증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우정. 정확히 분류하기 어려운 감정을 공유하며 인생의 전부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러니까 그들의 감정은 얼마나 촘촘하고 섬세한가.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느 날 관계를 명확하게 증명하길 요구받는다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난무하는 헤일셤에는 이런 소문이 있다.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운영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낸대. 그 결과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간 함께 지낸 다음 기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야.’(267쪽,『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소문의 출처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장기 이식을 유예할 수 있다면 삶을 좀 더 연장할 수 있다. 가느다란 희망을 안고 캐시와 토미가 사랑과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은 애처롭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될까 마음껏 꿈꾸는 시기에 어떻게 삶을 연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하는 모습이.      



사랑을 증명하고 장기기증 유예를 받기 위해 찾아간 캐시와 토미는 알게 된다. “너희는 그걸 믿는다는 말이지? 너희가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어떻게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는가? 이 난감한 질문의 실마리가 마담이 운영한 화랑에 있다고 믿는다. 화랑은 혜일셤 학생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한다고 알려진 곳이다.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 온 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에 대해 반문한다.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어쩌면 캐시, 루스, 토미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결속시킨 건 헤일셤에서 보낸 시간보다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바깥 세계와 다른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기증자 아니면 간병사. ‘간병사나 기증자가 되어 전국으로 흩어졌지만 고향인 그곳과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 뜻했다.’ (346쪽) 캐시와 루스, 토미는 친구와 애인, 가족 같은 관계를 지나 간병사와 기증자로 다시 만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돌보는 관계로. 캐시는 루스의 간병사에서 토미의 간병사가 된다. 그렇게 차례로 가장 친밀한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인간의 비인간성, 비인간의 인간성      



클론은 장기를 1차, 2차, 3차로 기증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결’(complete)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장기기증이라는 목적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임무완수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명이어서. 나에게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픈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완결’이다. 그들은 장기이식을 마쳤을 때 완결에 도달한다. 즉 죽음에 이른다.      



어쩌면 ‘완결’을 거부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증명하는 방법은 아니었을까. ‘그런 소문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라고 말하는 헤일셤 교장 선생님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따지지 않는 캐시가 한편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왜 헛된 희망을 주었냐고 따져보지도 않나. 교장과 마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토미는 깊숙한 숲속에서 ‘분노에 떨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하면서 고함’을 지른다. 그 고함은 토미의 영혼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이시구로는 서늘하게 묻는다. 장기기증을 위해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눈감고 애써 무시하는 인간과, 사랑과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치열하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복제인간 중에 누가 더 인간적이냐고. 동시에 유한한 삶이라는 점에서 복제인간과 인간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시구로가 만든 복제인간이라는 설정은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묻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나를 보내지 마』를 유한한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로 읽을 때 작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 제목을 원작과 통일하지 않고 '네버 렛 미 고'라고 했는지 의문이지만, 제목만큼이나 영화와 소설에는 큰 차이가 있다.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기 보다 소설의 장면을 줄이거나 바꾸는 식으로 각색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바꾼 대목은 '카세트 테이프'다. 리커버판 책 표지가 ‘카세트 테이프’인만큼 상징적인 물건인데 영화에서는 크게 강조가 되지 않는다. 주의 깊게 들어야 가사가 겨우 들려서. never let me go~       



영화의 제목이 된 『네버 렛미 고』는 주인공 캐시가 즐겨 듣는 노래다. ‘평생 간절하게 아기를 바랐으나,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여자’를 떠올리면서. 아마도 캐시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몸이 아닌 실험실에서 태어난 클론은 명을 창조할 수 없었다는 것. 자신이 그 아기가 되어, 나를 보내지 마,라고 노래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캐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 여인인 동시에 그 아기는 아니었을까.      





캐시가 베개를 끌어안고 노래를 듣는데, 이 장면을 소설에서는 화랑을 운영하는 마담이 보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루스가 목격하는 것으로 나온다. 마담을 루스로 바꿈으로써, 루스-토미-캐시의 관계를 영화에서는 더 부각시킨다. 반면, 소설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스를 마담이 목격하고 눈물을 흘린다. 학생들에게 한 번도 친절하게 대해준 적이 없지만 사실은 그들이 불쌍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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