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분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이 문장을 뒤집으면 자리/장소를 잃으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자리에 대한 불안은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도스토옙스키가 25세에 발표한 『가난한 사람들』(1846)에 이은 두 번째 작품 『분신』(1846)을 존재에 대한 인정과 부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품으로 읽었다. 나의 존재가 철저히 부정당할 때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하급관리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은 하인과 함께 ‘꽤 크고 웅장한 건물 4층 자기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하인이 준비한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집을 나선다. 언뜻 보면 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는 상당히 불안해 보인다. 직장 상사를 우연히 마주치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 대신 ‘저, 저는 아무도 아닙니다. 저는 전혀 아무도 아니에요. 전 제가 아니라고요.’라고 말해버린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사는 그냥 지나가 버리고 골랴드낀은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바보 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갑자기 주치의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요, 저는 제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거죠. 저만의 길을요. 저는 제게 아주 특별하며,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골랴드낀의 두서없는 말과 행동은 주치의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대체로 골랴드낀의 말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골랴드낀에게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기 비하의 자아와 ‘특별하며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가 있다. 그의 상반된 내면은 앞으로 나타날 분신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누구에게나 서로 다른 자아가 있으니까. 하지만 사회에서 표출되는 자아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을 ‘가면’이라고 부른다면 가면을 쓰고 가면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이다.
골랴드낀이 옷을 잘 차려입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상사가 주최하는 만찬에 가기 위해서. 거기에는 상사의 딸, 그가 연모하는 사람이 있다.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만찬에 도착하는데, 충격적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골랴드낀, 당신의 이름은 명단에 없습니다. 초대받지 않았어요. 다시 말하면 만찬에 그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그대로 물러나는 대신 밖에서 세 시간 넘게 추위에 떨다가 만찬에 겨우 들어간다. 그리고는 실수를 연발한다. ‘어떤 문관과 부딪쳐서 발을 밟고 귀부인의 치맛자락을 밟아 찢어 놓고 하인과 누구 한 사람을 밀었다.’ 그리고 우연히 키가 크고 훤칠한 장교 앞에 서자 골랴드낀은 자신이 진짜 벌레 같다고 느낀다.
골랴드낀은 내동댕이쳐지듯 만찬에서 쫓겨난다. 사회적인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월 날씨는 그의 절망을 더욱 고조시킨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날씨마저도 그에게 적대적이라니. 골랴드낀이 만들어낸 과대한 피해망상일까. 골랴드낀이 무도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날 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알아 보거나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골랴드낀은 진정으로 존재하긴 했던 걸까? 관료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삶이란 곧 그의 정체성의 근거였으며 그가 쓴 가면이 무너졌을 때 그의 삶도 함께 무너진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재가 되어 날아가고만 싶었다.’ 골랴드낀은 재난 같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그가 당도한 곳은 폰딴까 강. 아무도 없는 밤, 골랴드낀은 ‘폰딴까 강의 뿌옇고 검은 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골랴드낀은 폰딴까 강의 검은 물을 쳐다본다. 괴롭고 비참한 마음으로. 아마 그는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팽창된 불안의 끝은 어디인가. 골랴드낀은 불안한 기운에 휩싸이고 수수께끼 그림자를 만난다.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사람. 완벽하게 똑같은 그의 분신이었다.
‘물방울처럼 똑같이 닮은 사람, 복사한 것처럼 똑같은 사람이다.’ 골랴드낀의 분신은 작은 골랴드낀, 골랴드낀 씨의 동명이인, 새로운 골랴드낀, 제 2의 골랴드낀 등 다양하게 불린다. 분신이 같은 직장에 왔는데도 사람들은 혼란이나 동요는커녕 분신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적극적 호의와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골랴드낀에게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가짜가 나타나서 진짜 행세를 하다니! 마치 이것은 거대한 음모이자 함정 같다. 분신 골랴드낀은 순식간에 그의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지며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한다. ‘오 하느님! 어떻게 저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벌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분신이 거짓 행세를 한다고 해명하려 하지만 골랴드낀이 해명하면 할수록 모략과 비방으로 보일 뿐이다. 그의 해명은 당당한 자기 변호가 아니라 변명으로 비치고 사태는 점점 그에게 적대적으로 흐른다. 골랴드낀은 그토록 경멸하던 모사꾼, 비열한 사람이 되고 그가 두려워하던 원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 분신이었다. 내가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는 상황. ‘이제 난 어쩌지? 이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 이제 날 필요로 하는 데는 어딜까?’
독자는 소설 내내 골랴드낀이 느끼는 혼란과 불안을 경험한다. 무엇이 실제이고 환상인지 뚜렷하지 않다. 소설 『분신』 읽기가 혼란스러운 것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환상인지 경계가 불분명해서다. 분신의 존재가 골랴드낀이 만들어낸 광기의 산물이라면, 그가 분신의 등장으로 겪는 일련의 일들도 그의 환영이자 환상이다. 골랴드낀이 폰딴까 강의 검은 물에 빠지는 대신 만들어낸 환상. 환상은 한편으로 그를 비극적 결말에서 살리는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와 문학 사이
리처드 아요데 감독 영화 <더블>은 『분신』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첫 장면은 주인공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 장면. 텅텅 비어있는 지하철 안에 주인공 혼자 앉아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그림자. ‘내 자린데요. You are in my place’ 텅텅 비어있는 지하철에서 다가와 굳이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환상인가 현실인가. 환상이라면, 검은 그림자는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다. 자리에 대한 불안함이 그림자라는 존재로 표현된 것. 존재에 대한 불안. 그 불안은 어디서 왔는가?
7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그의 존재감은 뚜렷하지 않다. 직장 출입카드는 거부당하고 직장 동료들은 그가 있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으로 직장에서 주최한 무도회에서 그는 초대받지 않았다는 걸, 무도회에 도착해서 알게 된다. 설령 초대 명단에 이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를 위해 대신 항의하거나 증명해주는 동료도 없다. 골랴드낀이 밖에서 세 시간을 벌벌 떨며 기다리듯, 사이먼도 밖에서 배회한다. 사이먼이 소외와 배제에 저항하지만, 그의 말은 곧잘 무시당한다. 사이먼이 연모하는 한나를 만나기 위해 복사실에 가는 건 강력한 암시가 된다. 존재에 대한 극심한 위협이 탄생시킨 분신. 그의 존재가 복사당한다.
분신은 환영인가 실재인가? 분신 사이먼 제임스는 놀랍도록 빠르게 직장에 적응한다. 그의 존재감은 대단하며 모두 그를 인정한다. 분신의 존재로 그의 자리가 위협받지만 한편으로 분신은 사이먼의 욕망을 실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나를 단번에 사로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며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사이먼은 직장 출입 카드를 복구하러 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는다.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복귀시키나?
저, 원래 존재했어요.
이젠 아냐
아예 존재한 적도 없어
지금도 존재하고
여기 서 있잖아요
카드 발급을 거부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눈앞에 뚜렷하게 존재하는데 존재를 부정한다. 오히려 존재하는 사람보다 시스템을 믿다니. 그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면, 사람들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가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어느 누가 알아줄지 확신이 없다.
두 사람(진짜와 분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살아있는지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는 것. 죽어있다면 죽을 수가 없으니까. <더블>의 결말은 자살 시도다. 『분신』에서는 골랴드낀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지만 <더블>에서는 자살 시도 후 앰블런스에서 결말을 맺는다. 병원으로 가는건 동일하지만 목적이 다르다. 사이먼의 눈빛은 어느 때 보다 평안하고 살아있다. 그가 경험한 일은 한바탕의 지독한 악몽 그러나 동시에 ‘달콤한’ 악몽이었다. 적어도 그는 이제 줄에 매달린 인형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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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분신>의 골랴드낀을 가리켜 '내가 발견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사회적 전형'이라고 말했다.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자기 분열 끝에 분신이라는 환영에 갇히는 인물, 골랴드낀. 19세기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골랴드낀은 영화 <더블>에서 런던의 사이먼 제임스로 나타나고 21세기 지금 여기에서도 그의 형상은 낯설지가 않다. 자기 비하와 인정 욕망이 만들어낸, 나를 닮은 분신이라는 환영이 나의 존재를 위협한다.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