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법학, 의학, 신학까지 섭렵한 파우스트.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자 한 파우스트는 세상과 단절하고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캄캄한 서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 결과는? 평생 학문의 길을 걸었지만 알게 된 것이라고는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 재산도 돈도 명예도 없다고 한탄하는 파우스트. 지식에 대한 환멸과 번민 속에서 헤맨다. 독배를 들며 자살 시도를 하려는 순간,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난다.
메피스토는 계약을 제시한다. 서재 바깥에 있는 생의 활기를 그리워하는 파우스트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조건으로 영혼을 넘겨받는 계약이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하고 내뱉으면 메피스토와의 계약은 종료된다. 다시 말하면, 계약의 승패는 저 선언에 달려있는 셈이다. 그런데 무엇을 멈추라는 것인가? 인생의 절정의 순간에 우리는 외친다. 아, 시간이 멈추었으면! 시간이 멈추면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간'이 아니라 '순간'을 향해 외친다는 것이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한 선언. 절정의 순간은 아름다운 순간이며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순간이다. 최고의 순간은 분명 기대되는 일이지만 순간을 멈추는 동시에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의 것이 된다.
독일 감독 무르나우의 파우스트(1926)에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결정권이란 곧 시간을 지배한다는 의미 아닌가. 시간의 주인이 된 신과 같은 권능을 얻은 파우스트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마녀의 영약으로 회춘한 파우스트는 순수한 그레트헨의 마음을 얻지만 그레트헨과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훗날 그리스 최고 미녀 헬레나와 결혼하게 되지만 아들 오이포리온이 죽게 되어 역시 비극으로 끝난다. 이밖에도 파우스트는 여러 비극을 겪는다. 괴테『파우스트』가 다섯 개의 비극으로 구성된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메피스토가 쾌락을 선사하고 파우스트는 시간의 주인이 되었는데 비극이라니, 어떻게 된 일일까. 파우스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파멸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온갖 지식에 환멸을 느껴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모험을 택했다는 것을. 예정된 파멸 속에서 자신을 시험에 보겠다고.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가 제공한 쾌락을 누리지만 동시에 고통을 겪는다. 쾌락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 일까?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어서 빨리 <멈추어라!>를 외치기를 기다렸겠지만 파우스트는 쉽게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파우스트는 계속 Go. 멈추지 않는다. <멈추어라>고 외치지만 않는다면 그는 무한히 살 수 있다.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고 있으면서 계속 마지막 순간을 지연하는 파우스트.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끊임없이 방황한다. 쾌락과 고통으로 점철된 방황을.
여러 방황의 모험 끝에 통치자가 된 파우스트는 간척지 사업에 힘쓴다. ‘수천의 손 부리는 하나의 정신’의 지도자로서 수백만에게 땅을 마련해 준다는 명분을 갖고 과감하게 실행한다. 일을 수행하면서 사람들의 희생도 따르지만, 천국 같은 땅을 만든다는 더 큰 목적은 그러한 근심을 덮어 버린다. 발끈한 근심의 정령이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하지만, 그의 마음 까지 어둡게 하지는 못한다. 마침내, 파우스트는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
새로운 땅은 파우스트가 남겨놓은 흔적이 될 것이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준다는 기쁨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오른다. 이 순간이 파우스트가 맞이한 '최고의 순간'. 눈이 멀고 사랑을 잃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행복의 예감이 파우스트에게 정지하고 싶은 영원의 순간이 된다.
시계는 멈추었고 파우스트는 쓰러진다. '부정을 일삼는 정령’답게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명명한 최고의 순간을 허망한 순간이라고 폄하한다. 메피스토가 볼 때 행복은 아직 도래하지 않으며 파우스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행복이었으니까. 드높은 행복을 보지 못하는 메피스토는 순간적 쾌락을 행복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파우스트가 값싼 쾌락에 굴복하지 않았기에 그의 영혼은 구원된다! 시간을 멈출 수 있었지만 끝까지 멈추지 않고 방황하며 나아갔던 파우스트.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린 파우스트 연극(2000) 21시간 공연작
영화와 문학 사이
파우스트는 괴테가 6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60년 내내 작품을 집필한 것은 아니었다. 네 번의 주요 집필기 사이에는 십 년 가까운 공백이 있다. 괴테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작품 진척이 안 될 때는 다른 영역에 눈을 돌려 새로운 시작을 즐겨 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작품을 쓰는 시간조차 파우스트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면, 파우스트는 60년 동안 변화한 괴테의 삶의 궤적이 녹아든 작품이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 긴밀한 연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건의 흐름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장면도 나오는 등, 막과 막 사이 별도의 설명 없이 시간과 장소가 이동한다. 파우스트가 읽기 어렵다면, 서사화 하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서사란, 사건과 시간이다. 사건이 일정한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 서사인데 구체적 시공간을 벗어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독자를 곧잘 혼란에 빠뜨린다.
파우스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말로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광대하고 광활하다. 그곳은 상상의 세계이며 꿈의 세계. 마녀들이 살고 개미들이 말을 하는 세계다. 독일 신화 속에 존재하는 낯선 형상들과 온갖 요정과 정령들. 그리스 신화와 유리관에서 탄생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세계. <공포> <희망> <지혜>가 주체가 되어 저마다 목소리를 낸다. 대체 파우스트를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을까?
내가 본 영화는 독일 감독 무르나우의 흑백 무성 영화 《파우스트》(1926)와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제작한 《파우스트》다. 자막의 한계 때문에 영화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 일부만을 영화화한다. 무르나우 감독의 파우스트는 독일에서 전승되는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레트헨 비극에 초점을 맞추었고 소쿠로프 영화에서는 악마 메피스토를 고리대금업자로 설정되는 등 주요 설정을 바꾸어 영화화했다. 영화의 초점이 원작 파우스트와 달라지면서 주제의식도 바뀌었다. 12111행으로 구성된 운문을 영화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자,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에 비하면 장장 21시간에 걸친 원문에 충실한 연극은 독보적이다. 파우스트를 60년 에 걸쳐 쓴 괴테나 연극에 동원되는 모든 인력과 배우들이나 장시간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나 모두가 놀랍기는 마찬가지. 유튜브로 공연실황이 나와 있으니,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녹아져 있는 작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구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파우스트의 모험이 작품의 불멸성을 예견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은 노력하는한 방황한다’에 감응하는 한, 파우스트의 시간은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