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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04. 2022

영원이라는 순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1922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이 사십이 되어 이제 무엇인가에 대해 나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음을 확신한다.’ 1922년은 『제이콥의 방』이 출간된 해이면서 『댈러웨이 부인』 집필을 시작한 해. 울프는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생각에 기존의 리얼리즘과 다른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다. 소설에서 중시되던 인물 구성과 플롯이 아닌 내면세계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기록하는 것. 이른바 모더니즘 형식을 처음 시도한 작품이 『제이콥의 방』이었다면 1924년에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의 모더니즘 실험이 최초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 마음속의 느낌과 생각을 포착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 울프만의 고유한 발명은 아니었다. 울프 이전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목소리에 관한 것이라면 달라진다. 목소리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것이니까. 다시 말하면, 울프에게 소설 쓰기란 나만의 목소리로 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마음속 느낌과 생각을 포착하는 일에 대해서. 한 번에 얼마나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하는지를. 가령, 내 머릿속은 잡동사니처럼 어지럽다. 머릿속에 든 생각 중에 글로 옮기는 것은 극히 일부이며 만약 모든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긴다면 차마 눈뜨고 읽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정신없어서.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어렵다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 전쟁 후유증으로 신경증을 앓는 퇴역군인 셉티머스의 느낌과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치 수십 개의 투시경이 생각을 꿰뚫는 눈이 되어 여러 인물들을 비추고 있다. 인물과 인물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 경계가 없다. 마치 그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듯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월 중순의 런던.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 준비를 위해 꽃을 사러 거리로 나간다. 런던 거리는 생명력과 활기로 가득 차 있다. “난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거리를 걸으며 댈러웨이 부인의 시간은 곧장 30여 년 전으로 흘러간다. 열여덟 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닌 클라리사였던 시절로. 옛 애인 피터 월시와 여자 친구 샐리 시튼과 함께 했던 시절로.                    



현재 클라리사는 정치인 리처드 댈러웨이의 부인이 되어 상류사회 사교계의 안주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방을 간직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유되고 설명 되어야 했던 피터가 아닌 여유를 허용하는 리처드와 결혼한 것이다. 평온해 보이는 현재를 살지만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삶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 독감을 앓은 후 흰 머리가 부쩍 늘었고 영국 수상이 오는 파티를 주최하면서도 스스로를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로 여기는 쉰 둘에 이른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     





유월 런던 거리에서 삶에 대한 환희를 느끼면서도 오찬 모임에 초대받지 못해 섭섭함을 느끼는 그녀다. 감정이란 얼마나 시시각각 변하며 유동적인지 그리고 다층적인지! 기쁘면서 슬프고 두려우면서 기대하고. 인간의 감정이란 평면이 아니라 다면적이라는 것을. 감정의 모양을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만 말한다면 입체적인 감정을 한쪽 면만 본 것이리라. 그러므로 삶의 다층적인 면을 나타나기에 의식의 흐름기법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댈러웨이 부인과 서른 살의 퇴역군인 셉티머스는 한 번도 만나지 않지만 의식으로 연결된다. 생각과 느낌을 보여주는 투시경이 런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비추며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셉티머스에게는 전쟁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전쟁 당시 겪은 동료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때 경험한 죽음의 그림자가 현재에도 드리운다. 그는 환각과 광기를 겪으며 유월의 런던 거리가 아니라 여전히 전쟁터에 있다. 그의 의식은 과거에 있고 과거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셉티머스의 아내 레치아는 어떻게든 그를 과거에서 구출하여 현재를 살게 하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왜 누군가는 전쟁과 무관한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울프는 보여준다. 누군가는 온전히 순간을 누리는데 누군가는 순간을 누리지 못하고 과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를. 런던 한복판에 있는 시계탑 빅벤은 시간을 공평하게 알리지만, 시간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이며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가령, 누군가는 오늘날의 아름다운 가을빛을 누군가는 온전히 누리며 즐기겠지만, 누군가는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가을빛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엔도 슈사쿠의 말을 바꿔서)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와 시간을 살지만 저마다 시간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런던 유월의 어느 하루를 통해서 본다.          



마찬가지로 파티 역시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옛 애인 피터는 파티를 속물들의 모임이라고 비난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파티는 삶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어떤 순간은 영원하니까. 피터와 샐리와 함께 했던 시절(순간)이 클러리사에게 평생 지속 되었듯이 그들 셋이 함께 했던 시간은 어느 순간 단절 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속에 살아있다. 셉티머스에게도 전쟁에서 보냈던 시간, 그의 친구 에반스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 그의 기억을 지배하여 환각과 광기에 시달렸듯, 어떤 순간은 끈질기게 지속되는 기억으로 남는다.          



파티 도중 셉티머스의 죽음 소식이 날아온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소식을 들은 댈러웨이 부인은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에서 벗어난다고 느낀다. 삶과 죽음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더 나아가자면, 지금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가능하다는  깨달음. 그의 죽음을 동정하거나 죽음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기보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 파티라는 현장과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선명하게 감각한다.     



그러므로 파티는 즐거운 순간을 기억으로 봉인하는 방법이 된다.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즐거운 순간을 선사하는 것이 댈러웨이 부인의 기쁨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독감을 앓은 후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런던 거리로 나가 꽃을 직접 사러 가는 것.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그 순간이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와 문학 사이   




의식의 흐름은 영화로 어떻게 옮겨질까. 영화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주인공의 목소리로 직접 서술하는 내레이션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을 나타낸다. 그러나 시시각각 흐르는 모든 의식을 담아낼 수 없는 법. 대신 소설에 없는 장면이 영화에 있다. 가령,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셉티머스와 댈러웨이 부인이 꽃가게에서 눈이 마주친다. 물론 서로 모르는 채로, 우연히 스치는듯한 마주침이다. 배우들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되면서 잠시 정지된듯한 화면을 연출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이 장면은 결말을 위한 일종의 복선이 된다. 서로 다른 타인의 삶도 어떠한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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