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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07. 2022

세 여자의 하루

마이클 커닝햄의 『디 아워스』

‘평범한 여자의 하루가 소설로 쓸 만한 이야기가 될까?’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면서 물은 질문이다. 전쟁이나 신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모자를 선택하고 파티를 준비하고 케이크를 만드는 하루가 과연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사소한 일의 중대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절박한 심정을 담아내고 싶었던 버지니아 울프. 마이클 커닝햄이 『디 아워스』에서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가제가 ‘디 아워스’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이클 커닝햄은 버지니아 울프가 선택하지 않은 제목 『디 아워스』를 되살려 놓은 셈이다. 그는 『댈러웨이 부인』을 다시 쓰면서 동시에 ‘시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시간들’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시간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때와 다른 지금을 확인하는 순간, 어느새 변한 날씨를 알아차리는 순간, 시간을 감각 한다. 시간의 흐름을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어쨌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겉으로는 그저 꽃을 사러 길을 나섰을 뿐이지만, 생각은 그것과 무관하게 쉬지 않고 흐른다. 멈추지 않는 마음의 작용은 시간과 닮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시간들’, 디 아워스는 순간들의 모음이다. 흩어진 순간들을 모으면 시간이 되고 시간들이 모이면 세월이 된다. (『디 아워스』는 처음에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그러므로 세월을 이루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살피면 삶의 단면을 만날 수 있다.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의 하루를 보여준다.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1949년의 로라 브라운, 1999년의 클러리사 본. 제각각 다른 시공간에 있지만 그들의 시간은 연결되어 있다. 연결 고리는 댈러웨이 부인. 댈러웨이 부인을 쓰는 울프 부인과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브라운 부인,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러리사. (그렇다. 그들은 모두 ‘부인’이다.)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디 아워스>(2003)에서 옛 애인에게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러리사 본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20세기 뉴욕의 댈러웨이 부인, 클러리사가 꽃을 사는 이유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유명 작가이자 옛 연인, 지금은 에이즈로 쇠락해 가는 리처드를 위한 파티다. 명예로운 상을 받는 리처드를 축하하기 위해 클러리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선다. ‘이 얼마나 신나고 놀라운 일인가. 이런 6월 아침에 이렇게 살아 있다니, 이렇게 성공적이라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특혜를 받다니. 단순한 잔일만 주어진 채. 그녀, 클러리사 본.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사야 할 꽃이 있고 열어야 할 파티가 있다.’(24쪽)          



파티를 손수 준비하는 일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파티를 연다는 것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때 가능한 일. 클러리사에게는 같이 사는 동성 연인 샐리가 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옛 연인을 위해 에너지를 쏟는가. 그들이 30년 전 나눈 키스와 사랑, 잊지 못할 산책. 그것이 클러리사와 리처드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대부분의 순간은 새로운 시간에 떠밀려 퇴색되어 버리지만 어떤 순간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 자리를 차지한 어떤 순간은 시간의 공격에도 위협받지 않고 모든 것을 버티게 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아픈 리처드를 곁에서 돌보는 이유는 순전히 그 순간 때문에. 삼십 년 전 열여덟 살 나눈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리처드여서.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로라 브라운 



한편,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로라 브라운은 남편 생일을 위해 파티를 연다. 파티의 핵심은 케이크 만들기다. 로라는 온 하루를 바쳐 케이크를 만든다. 멋진 케이크가 놓인 축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비록 케이크에 초를 불고 나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일지라도. 단지 한순간을 위해서 온 하루를 바쳐야 된다는 것에 대해 로라 브라운은 화가 나 있는 걸까. 로라는 자신을 되찾고 진정시키기 위해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무엇을 진정시키는가? 울컥하고 찾아오는 그 무엇.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순간을 진정시키는 것. 꽃을 직접 사러 가고 파티를 준비하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생명에의 환희로 빛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강렬한 죽음에 대한 열망을 누그러뜨린다. 그래 나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어. 케이크를 준비해야 해. 일상의 추진력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소한 일상이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은 얼마나 위대한가.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세 여자는 부단히 무언가를 창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고 댈러웨이 부인은 최고의 파티를 준비한다. 로라 브라운은 남편 생일을 위한 케이크를 만든다. 파티와 케이크는 하나의 창조다. '세속적이고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완벽한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214쪽) 그들은 순간을 창조한다.     




댈러웨이 부인을 쓰느라 고심하는 버지니아 울프 



‘하루하루가 기록도 없이 그냥 흘러간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꼈던 울프는 사라지는 순간을 붙잡고 싶어서 30년 가까이 일기를 썼는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수돗물이 그냥 허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순간의 불멸성. 지나가는 순간은 어떻게 영원이 될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이 멈추면 순간은 영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시간은 멈추지 않으므로 내가 멈출 수 있다. 죽음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삶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쁘다. 가능한 한 모든 선택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에는, 어떤 두려움이나 교활함도 없이 당신의 모든 선택을 고려해보는 것에는 커다란 위안이 담겨있다.’(228쪽)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에서 살아간다. 삶과 죽음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사이는 멀지 않다. 가깝다.      


     

신경이 불안정한 버지나아 울프는 남편 레너드의 충실한 보살핌을 받는다. 울프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서 교외로 이사왔지만 울프에게 진정한 삶은 런던에 있다. ‘리치먼드에서 서서히 증발되는 것보다 미쳐 날뛰다 죽는 한이 있어도 런던에 있는 쪽이 나은 것이다.’ 울프가 런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삶에 대한 열정이자 사랑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삶에의 에너지로 가득 찼던 것처럼. 그러나 울프는 훗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은 채 강으로 걸어 들어간다. 레너드에게 남긴 편지 마지막에는 이렇게 써 있다. ‘나는 어느 두 사람도 우리만큼 행복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리처드를 통해 정확히 반복된다.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에게 파티에 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시 삼십 년 전 그때를 회상한다. ‘사랑해. 우리 두 사람만큼 행복했던 사람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 된다. 리처드가 죽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는다. 아, 이제 끝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다. 클러리사다. 클러리사는 리처드로부터 해방되고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부터 해방된다.           



리처드가 죽은 후에도 파티는 취소되지 않는다. 그렇다. 파티는 계속되어야 한다.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 파티는 여전히 펼쳐져 있고 꽃들은 여전히 신선하다. 아직 죽지 않은, 상대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위한 파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운 좋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파티다.(328쪽)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에만 나오는 장면 중 하나. 남편 레너드는 버지니아에게 묻는다. 『댈러웨이 부인』에 왜 죽음을 넣어야 하는지를. 여기서 죽음은 셉티머스의 죽음을 말한다. 문학을 사랑하며 유명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던 평범한 젊은이인 셉티머스는 전쟁에 참전하고 우울증을 겪다 자살하는 인물.  


 

레너드: 누굴 꼭 죽여야만 하나?     

버지니아 : 누가 죽어야만 산 사람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죠.     



삶과 죽음을 나란히 배치하여 대조 효과를 기대한 버지니아 울프는 활기로 가득한 파티 현장에 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이 끼어들도록 설정한다. 이러한 배치는 『디 아워스』에도 반복되어서 파티를 앞두고 자살하는 리처드의 죽음과 셉티머스의 죽음이 포개진다.  리처드는 파티에 가야한다는 압박에 , 셉티머스는 정신요양원에 가야한다는 압박을 받고 창문에서 떨어진다.  '옛다, 봐라'하면서 어떤 비극도 없이. 


죽음을 목격한 클라리사 본이나 셉티머스의 부인 레치아는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클라리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레치아는 셉티머스의 죽음을 이해하며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댈러웨이 부인도 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을 듣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기쁘게 여긴다. 죽음을 기쁘게 여기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버지니아 울프의 의도대로  댈러웨이 부인은 셉티머스의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환기하게 되니까. 죽음이 자신의 속물적인 삶과 대비가 된다는 것을 돌아본다. 클라리사 본도 리처드를 위한 파티를 열어준다고 했지만 실상 그것은 명분일뿐, 자신이 돋보이기 위함이었음을 마주한다. 속물적인 삶에 메여 살아가는 자신들보다 모든 것을 다 내던져 버리고 죽음을 택한 그들이 오히려 더 나아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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