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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Sep 18. 2022

글쓰기와 속죄의 가능성

이언 매큐언의 『속죄』

 

소설에서 만난 인상적인 몽상가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빨강머리앤. 초록 지붕 집의 빨강머리앤은 상상 속에서 친구를 만들고 상상으로 더 나은 현실을 꿈꾼다. 오갈 곳 없는 열한 살 소녀 앤에게 상상력은 선물이자 현실을 지켜주는 방패이자 무기가 된다. 앤이 보여준 천진한 상상력에 길들어 있다면, 상상력이 지닌 파괴적인 힘을 상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앤 나이 또래의 소녀가 상상력을 무기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한다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책임으로 평생 속죄하는 삶을 사는 소녀가 여기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문학동네,2003)에 나오는 브리오니다.          



브리오니는 상상력을 비밀의 원천이라 여기는 글쓰기 열정으로 가득한 소녀다. 열한 살에 첫 소설을 쓰고 가족들에게 격려받으며 계속 글을 쓴 브리오니는 열세 살에 ‘이틀 동안 아침과 점심까지 거르면서 신들린 듯 써내려’ 연극을 완성한다. 연극 제목은 <아라벨라의 시련>. 제목부터 비극적인 느낌을 풍기지만, 브리오니는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브리오니에게는 글쓰기 열정 말고도 다른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말끔하게 정돈하려는 열망, 조화롭고 정돈된 세상에 대한 바람이다. 그러니 브리오니는 통제되지 않는 세상을 글로써 통제하고 시련을 극복하여 사랑을 이루어내는 서사를 만들 수 있다. 열세 살이 갖기엔 어쩌면 대담하고 대범한 상상.     



‘글쓰기는 자기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짜릿함뿐만 아니라 세상을 축소하여 손안에 넣는 즐거움까지 맛보게 해주었다.’(19쪽)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2008)에서 브리오니를 맡은 13살의 시얼샤 로넌



여기서 잠깐 물어보자. 세상을 축소하여 손안에 넣어 장악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창조하고 바꾸고 파괴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 브리오니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소설가라는 신.     



독자는 책을 덮고 나면 혼란스러워진다. 소설 『속죄』가 사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아니라 브리오니의 소설이었다는 사실에. 5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의 이야기가 한 소녀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에. 독자는 여기서 선택해야 한다. 누구의 시점으로 읽을 것인지를.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브리오니가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염두하고 읽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브리오니가 언니 세실리아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브리오니가 더 큰 위험을 막겠다는 과도한 영웅심이 빚어낸 거짓 증언은 속죄될 수 있는 것일까?      



브리오니는 1935년 찌는듯한 무더운 여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촉발된 일련의 일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로 옮겼다. 무려 59년 동안. 한평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이다.      


사건은 탈리스 저택 분수대에서 일어난다. 분수대 앞에서 언니 세실리아가 옷을 벗고 로비가 그 앞에 있다. 로비는 탈리스 집안을 돌보는 가정부의 외아들. 총명하고 성실한 로비는 탈리스 가의 후원으로 공부하고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다.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브리오니는 의문이 든다. 왜 세실리아 언니가 옷을 벗고 느닷없이 분수로 뛰어들지? ‘도대체 로비에게 언니를 마음대로 움직일 힘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브리오니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직접 묻기보다 상상으로 채웠고 상상을 곧 사실이라고 믿는다.    


 


로비(제임스 맥어보이)와 세실리아 (키이라 나이틀리)



로비로부터 세실리아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브리오니는 편지를 몰래 뜯어본다. 로비가 실수로 잘못 넣은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들어간) 편지를 읽어버린 브리오니의 의혹은 더욱 커진다. 세실리아 언니를 음흉한 로비로부터 구해야 해! 브리오니에게 위험인물로 입력된 이상 이제 로비의 모든 행동은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뿐이다. 그날 밤 세실리아와 로비가 서재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브리오니에게 로비는 난폭하게 보인다.)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이제 의혹을 굳히기 시작한다. 한번 길을 잘못 든 상상력은 거침없이 질주하여 거짓을 진실로 바꿔치기한다. 브리오니는 사촌 롤라를 강간한 사람을 로비로 지목하는 거짓 증언을 하고 진짜 범인인 유명 사업가 폴 마샬과 롤라는 침묵으로 공모한다. 전도유망하던 로비의 미래는 한순간에 추락하여 감옥에 가게 되는데...이 모든 것을 침묵으로 방관하고 진실에 눈감는 가족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세실리아는 가족과 절연하고 집을 떠난다.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은 이제 어떻게 되나. 로비는 전쟁에 투입되고 세실리아는 로비를 기다리며 전장에서 간호사로 복무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각의 장소에서 편지를 교환하며 사랑을 이어간다. 그들이 나누었던 짧고 강렬했던 사랑의 기억에 의지하면서. 한편 브리오니는 대학 진학 대신 세실리아처럼 간호사의 길을 걷는다.      



어떤 결심은 너무 늦다. 아무리 진심이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러나 브리오니는 소설로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 혼돈보다는 정돈을, 혼란보다 질서를 원하는 브리오니에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이 영영 비극으로 끝날 수는 없으므로. <아라벨라의 시련>에서 사랑 때문에 도피한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이루듯,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들이 서로를 그리워만 하다가 죽었다는 진실은 브리오니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성공한 작가가 된 브리오니는 일흔일곱에 이르러 고백한다. ‘<아라벨라의 시련>을 쓴 이후로 난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멀리 길을 둘러 가다가 서둘러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519쪽) 브리오니는 여전히 믿고 싶은 대로 믿고자 한다. 뇌졸중 진단을 받고 ‘망각이라는 파도’를 겪는 브리오니는 어쩌면 이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진실이 아닌 소설로 구현된 세계만을. ‘우리는 모두 내 창작품 안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쪽)          



나는 브리오니에게 묻고 싶다. 속죄를 위해 쓴 소설은 오히려 자신에게 스스로 변명할 기회를 준 것 아니냐고. 속죄란 결국 자기만족이자 자기 위안이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브리오니를 용서해 줄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없는데 누구에게 용서를 받을 것인가? ‘죄책감은 자신을 고문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냈고, 시간이 가면서 떠오르는 세밀한 기억의 구슬을 하나하나 실에 꿰어 평생 동안 돌리면서 기도해야 할 묵주를 만들어놓았다.’(248쪽) 브리오니가 50년 넘게 괴로움과 죄책감 속에서 만든 묵주는 소설이었으며 기도는 글쓰기였다.      






영화와 문학 사이





이언 매큐언은 <속죄>의 배경이 되는 탤리스 저택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문학 언어와 영화 언어를 능숙하게 넘나드는 이언 매큐언은 영화 <속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때, 필연적으로 내용이 축소되거나 바뀌는데 그중 한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소설에서는 브리오니의 일흔일곱 번째 생일에서 가족들에게 큰 축하를 받으며 지난날을 회고한다면, 영화에서는 방송 인터뷰에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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