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에마』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에마』에서 주인공 에마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물이다. ‘미인이지 총명하지 부유하지 거기에다 안락한 가정에 낙천적인 성격까지 갖춘 에마 우드하우스는 인생의 여러 복을 한 몸에 타고난 듯했고, 실제로 세상에 나와 스물한 해 가까이 살도록 걱정거리랄 것이 거의 없었다’ 주인공 이름을 앞세운 소설답게 에마에 대한 묘사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실, 제인 오스틴 작품의 여주인공은 대부분 미인이며 총명하며 낙천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 『이성과 감성』의 매리엔을 보라. 그러나 에마가 다른 여주인공과 가장 크게 구별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에마가 부유하다는 점이다.
에마 우드하우스는 3만 파운드 상속녀로 나온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만 연간 천 오백 파운드에 달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이모 집에 보내졌던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이성과 감성』의 대시우드 자매 앨리너와 매리엔과는 확연히 다른 처지다. 3만 파운드라는 돈은 월러비가 매리엔이 아닌 지참금이 많은 여인을 선택하게 했던, 그 만큼의 액수이다. 레이디 수잔이 온갖 계략을 꾸미고 치밀하게 계산하여 결혼을 감행했던 이유도 자신의 생활과 품위 유지를 위한 돈 때문이 아니었던가.
결혼으로 행불행이 결정되는 다른 주인공과 달리 에마는 결혼에서 자유롭다. ‘여자를 결혼하게끔 하는 그런 요인들이 나한테는 하나도 해당이 안되니까. 만일 사랑에 빠진다면 물론 다른 문제지만! 그렇지만 나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건 내 방식도 아니고 내 성정에 맞지도 않아.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사랑도 없이 팔자를 바꾼다면 바보 같은 짓이지.’ 에마는 가난한 노처녀가 될 염려가 없으며 ‘재산 많은 독신녀라면 늘 존경받고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분별 있고 유쾌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말하자면 에마가 지닌 자신감의 근거는 든든한 재산이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재산은 매우 구체적으로 자주 언급된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얼마만큼의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으며 유산을 받을 것인지가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시골에 저택이 있으면서 휴가를 보내기 위한 곳이 런던이나 다른 지역에도 있는지, 이륜마차, 사륜마차 등 마차 소유 여부(어떤 마차를 갖고 있느냐는 요즘으로 치자면 어떤 차를 갖고 있느냐)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대상이다. 재산의 규모에 따라 인물이 갖는 영향력이 그려지면서 소설의 전반적인 이야기의 구도가 형성된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재산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배경이자 ‘풍경’인 것이다.
오스틴 소설이 단순히 신데렐라가 된 주인공이나 사랑과 결혼을 다룬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승전 결혼으로 끝난다고 단정짓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그리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이 촘촘하게 펼쳐져서다. ‘근대 영국 소설은 처음부터 세속적 현실을 다룰 뿐 아니라 독자의 손에 쥐어지기를 열망하는 책 상품이었다. 그러기 위해 최초 작가들은 가급적 ‘현실’ 같고 ‘실화 같은’ 말투와 이야기를 꾸며내는데 열중했다.’(『재산의 풍경』, 윤혜준) 18세기 다니엘 디포의 소설, 19세기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 토마스 하디의 소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대 영국소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소유권의 창출, 이전, 승계, 상속 및 소유권 분쟁이라는 민법의 세계’ 이기 때문에 근대 영국소설의 배경과 맥락을 안다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딸만 다섯인 『오만과 편견』의 베넷씨의 재산이 사촌인 콜린스씨에게 가야 했던 상황이 예로 나온다. ‘상속자가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면 남자 형제나 부계 사촌의 장자에게 재산이 가도록 재산권을 묶어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장자상속에 따른다고 해도 신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사촌 간 결혼에 대한 금기가 없었던 서구에서는 재산을 상속받을 친척 총각에게 딸을 주는 것이다. 베넷 씨의 경우, 딸 중 하나를 콜린스씨에게 시집 보내면 자신의 사망 후에도 자기 자식이 그 대토지 재산권 향유에 동참할 수 있으니 이 방안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114쪽, 『재산의 풍경』)
그런데 『에마』에서 우드하우스씨도 이저벨라와 에마 이렇게 딸 둘만 있는데 상속 문제가 크게 거론되지 않는다. 3만 파운드라는 돈이 에마에게 상속되도록 이미 배분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 현실에서는 ‘재산권 조정을 통해 해당 대토지의 임대수입에서 자신의 사망 시 피상속자가 자기 부인과 딸들에게 일정액의 현찰 연금이 분배되도록 묶어둘 수 있었다’고 하니 『오만과 편견』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장자상속의 신축적 조정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해 놓은 반면 『에마』에서는 딸 에마에게 분배되도록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에마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 내세우는 아픈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는 말은 하트필드를 떠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에마는 돌아가신 엄마와 결혼한 언니 이저벨라를 대신한 하트필드 저택 안주인 노릇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여긴다. 하이베리 마을에서 하트필드의 우드하우스가문은 최고의 집안으로 칭송받으므로. 따라서 에마에게는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결혼이 최선이며 그러한 형태의 결혼이라야 가능하다.
제인 오스틴은 비혼주의 여주인공을 설정했으나 예상하듯 에마를 비혼으로 두지 않는다. 하트필드 만큼이나 멋진 저택 돈웰애비의 소유자 나이틀리씨를 예비해두었다. 에마는 돈웰애비로 '이동'하여 그곳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트필드 안주인으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약속받고 나이틀리의 청혼을 수락한다. 즉 '이동'하는 사람은 에마가 아니라 나이틀리씨. '대등한 결합일 때 함께 행복해지는 법'이라는 생각으로 나이틀리씨는 기꺼이 하트필드로 이동한다. 제인 오스틴이 『에마』를 통해 제시하는 '대등한 결합'이다.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 <에마>(2020)를 연출한 감독 어텀 드 와일드는 사진작가 출신이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영상의 색감부터 에마를 비롯한 등장인물이 입고 나오는 의상, 배경 모두 감각적이다.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 <에마>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소품에도 세심한 공을 들이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하는 영화의 절정은 나이틀리 씨의 청혼을 받고 코피 흘리는 에마의 모습.
에마가 자매이자 친구처럼 여기는 헤리엇이 있다. 예쁘고 착한 헤리엇은 신분이 불투명하여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계층에 속한다. 에마는 친구라는 명분으로 헤리엇의 결혼에 적극 개입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헤리엇에게 투사된 에마의 허영심만 보여줄 뿐이다. 당시 부유한 여성은 후원의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은 여성을 지원했다. 일종의 '자선 행위'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부유한 엘튼 부인이 제인 패어팩스의 후원을 자처하면서 에마-헤리엇과 대결구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재산이 계급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제인 오스틴은 당시 '재산이 말해주는 것'을 작품 속에 영리하게 투영해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