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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Dec 21. 2021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 유명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얼마나 대단한 아름다움이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아름다움이 단순히 보기에 좋은, 눈이 정화되는 아름다움만은 아닐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작품 『백치』(1869)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백치』를 끝까지 읽도록 이끈 것은 바로 그 문장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세상을 구원할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도스토옙스키는 『백치』를 통해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했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단 한 분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물이 존재하지.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이야.’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인물, 미쉬낀 공작. 스물예닐곱 살 가량되는 젊은이, 미쉬낀 공작은 간질병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서 4년 동안 요양하다 기차를 타고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병을 앓느라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세상 물정도 모른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로고진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는 미쉬낀.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이 상대의 마음을 연다. 순수함은 양면적이다.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지만 의심하지 않는 성품은 속물적 사회를 살아가는 데 불리하다. 그래서 그는 ‘백치’(idiot)로 불린다. 순수하고 착해서. 일상에 서툴고 진지해서 웃음을 산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있다. 본질을 꿰뚫는 눈.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순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진실된 눈이 있어서다.



로고진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나스따시야.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로고진은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사고자 한다. 로고진의 입을 통해 처음 나스따시야의 이름을 들은 미쉬낀은 나중에 그녀의 초상화를 보게 된다. ‘대단한 미모군요! 그런데 이 얼굴에는...많은 고뇌가 담겨 있어요...’ 미쉬낀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고통을 보는 눈이 있다. 그가 병을 앓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한 것이 아닐까.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듯이.




나스따시야 @ 백치(2003) 러시아 tv 시리즈



나스따시야 주변에는 그녀를 돈으로만 사려는 인물들로 득실거린다. 부호의 손에서 양육되고 성장하면서 그녀는 모욕당했다. 나는 창녀에요.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녀 이면에는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 같다. 어린 고아였던 그녀에게 당시 어떤 선택이 있었을까. 그녀의 ‘세상을 전복시킬 미모’ 는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을 저주하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다. 나스따시야는 모든 남자들이 사고 싶은 여자다. 쇼윈도에서 번쩍이는 값비싼 물건이다. 나스따시야는 자신이 물건처럼 거래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물건으로 취급되는 자신의 운명에 복수하기 위해 물건 되기를 거부한다. 경매와 흡사하게 된 생일날, 자신과 결혼하면 주어지는 지참금, 돈다발을 활활 타는 난로 속에 집어 던지면서 외친다. 난 너희가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미쉬낀은 나스따시야를 불쌍히 여기며 구원하고자 한다. 미쉬낀의 진실된 마음을 안 나스따시야 역시 마쉬낀을 사랑한다. 이렇게 로고진, 미쉬낀, 나스따시야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는데 여기에 장군의 딸 이글라야가 미쉬낀을 사랑하면서 사각관계로 복잡해진다. 문제는 미쉬낀이 나스따시야와 이글라야 사이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나스따시야와 이글라야 모두에게서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미쉬낀의 선택은 ‘불행한’여자 나스따시야를 향한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는 도망친다. 새하얀 눈처럼 깨끗한 마쉬낀이 자신의 더러움으로 오염이 될까봐.



나스따시야가 모욕당했다는 사실, 수치는 그녀의 불행을 정당화하고 변덕을 부리는 근거가 된다.  ‘수치심이 없다면 더 불행해질거에요’ 이글라야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미쉬낀이 나스따시야의 수치심을 덜어준다면, 나스따시야를 지탱했던 불행의 힘이 없어진다면 나스따시야는 더 이상 그녀자신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스따시야는 자신을 무섭게 소유하려는 로고진에게로 돌아간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그리하여 결국 불행한 결말로 치닫는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소유하기 위해) 죽이고 이글라야는 사기꾼과 결혼하고 로고진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미쉬낀은 전보다 더 심한 백치가 되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간다. 구원의 실패. 진실 되고 선한 의지를 지닌 미쉬낀의 아름다움은 세상은 커녕 어느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 그리스도>형상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미쉬낀의 눈을 빌려서 보자면, 그는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아름다웠다.




로고진(좌) 미쉬낀 (우)




로고진과 미쉬낀은 친구이면서 적이고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의형제이면서 원수이다. 나스따시야를 사이에 두고 철저히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미쉬낀은 로고진을 끌어안는다. 로고진이 나스따시야를 죽이고 그 옆에서 발광하며 웃고 울을 때 미쉬낀은 로고진을 끌어 안으며 함께 운다. 함께 우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고자 했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연민이라는 아름다움을.




영화와 문학 사이



아름다움에 관해 묻는 소설 『백치』는 영화 뿐 아니라 드라마, 연극, 발레 공연으로도 만들어졌다. 그중 러시아 TV 시리즈 <백치>는 10부작으로 구성된 작품. 사건의 중심이 되는 나스따시야는 ‘세상을 전복시킬 미모’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한마디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작품 전반에서 뿜어내는 나스따시야의 '포스'는 어디서부터 유래하는 것일까. 나스따시야가 '부자의 첩'이지만 천박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지성과 독서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주도권은 '색깔있는 여자' 나스따시야에게 있다. 돈다발을 불구덩이 속에 내던질만큼 한 성격하는 것이다. 나스따시야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영화로 만들어질 때 가장 궁금해지는 인물이다.




러시아 TV 시리즈 <백치> (2003)에서 왼쪽부터 나스타샤, 미쉬낀, 이글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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