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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27. 2022

하얀 밤의 꿈

도스토옙스키의 『백야』



하얀 밤, 백야. 초저녁처럼 밝은 밤이다. 여름에 북유럽에서 나타나는 기후 현상, 백야. 거대한 러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가 백야 기간이라고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밝은 밤이라니, 얼마나 신비로울까. 추분을 지나 밤이 점점 길어지면서 까만 밤에 상상해보는 하얀 밤. 백야는 환상 속의 시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옙스키의 도시’라고 불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도시에서 40년 이상 거주하며 첫 소설과 마지막 소설을 비롯해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1848년에 발표한 『백야』도 그중 한 작품. 나흘간의 밤과 아침 동안 펼쳐지는 소설 『백야』(열린책들, 2010) 는 화자 ‘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화자는 몽상가를 자처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체를 나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도시를 걷는 고독한 산책자이자 이방인. 몽상가(dreamer), 꿈꾸는 사람이다. 꿈속에서 소설을 짓는 문학적인 사람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길을 걷다가 운하의 난간에서 울고 있는 한 여성을 본다. 다가가려 하지만 망설여진다. 그때 여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도와주면서 말을 걸게 된다. ‘나는 지금 무언가에 놀라고 있습니다. 마치 꿈 같습니다. 아니 나는 꿈속에서조차 언젠가 어떤 여성과 말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친한 사람 없이 지낸 그는 산책을 하다가 자주 마주치는 노인에게 우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거리의 건물들을 친구로 삼으며 지내왔다. 그런 그에게 한눈에 반한 여성과 대화를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던 것. 



여성의 이름은 나스쩬까. 독백에 익숙한 몽상가는(소설 끝까지 화자 ‘나’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대화도 책 읽듯이 한다. 나스쩬까는 그의 장광설을 받아주며 대화를 이어간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흘간의 밤 동안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단 2분 동안에 당신은 나를 영원히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행복한 인간으로요.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내가 내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242쪽)



만나자마자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활짝 열린 대화에 나스쩬까도보답하듯 자신의 얘기를 꺼낸다. 나스쩬까에게는 1년 동안 기다린 남자가 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나스쩬까는 다락방에 이사 온 새 하숙인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는 1년간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다. 남자는 나스쩬까에게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나스쩬까는 할머니의 감시를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날을 고대하며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드디어 1년이 지나고 약속한 날이 돌아왔지만 남자에게서 소식이 없다. 나스쩬까가 운하의 난간에서 울고 있던 이유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지만, 몽상가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나스쩬까 대신 남자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슬픔을 달래준다. ‘당신은 정말 사심 없는 분이세요! 당신은 훌륭하게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제가 결혼을 한 뒤에도 우리는 친하게, 오누이보다 더 친하게 지낼거예요. 저는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나스쩬까가 몽상가에게 오누이와 같은 사랑을 말했다면 그가 나스쩬까에게 향한 마음은 다른 사랑. 몽상가의 마음은 끔찍하게 슬퍼지고 눈물이 솟구치지만 천진한 나스쩬까 앞에서 내색하지 않는다. 속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사랑을 고백하는데 나스쩬까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잊고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이 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기다리던 남자가 돌아 온다. 나스쩬까는 몽상가의 손을 단번에 뿌리치고 그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라진다.



나스쩬까는 떠나고 그녀와 함께 했던 나흘간의 밤은 꿈처럼 지나간다. 몽상가는 나스쩬까와의 사랑으로 가장 높은 행복의 순간을 맛보지만, 곧바로 추락한다. 다음 날 아침 나스쩬까는 사과의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해 주세요! 당신과 그 사람 두 분 다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다면! 아, 당신이 그 사람이었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스쩬까는 떠나버렸는데. 그에게는 무엇이 남았나.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돌아선 데 대한 모욕? 사랑에 대한 배신감?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사해준 나스쩬까에게 감사하며 그녀의 행복을 빈다.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310쪽)



몽상가의 마지막 대사는 소설의 제사와도 겹친다. ‘그는 네 가슴에 단 한 순간이라도 가까이 있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 몽상가는 나스쩬까와 단 한 순간이라도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꿈 속에서 사는 죽은 삶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 속 행복을 맛보았기에. 고독 속에 살고 있던 몽상가에게 나스쩬까를 향한 사랑은 현실에서 온 구원이 아니었을까. 나스쩬까가 떠났기에 이제 그는 다시 꿈(몽상) 속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가 혼자 있는 동안 행복한 기억을 더듬으며 살아갔듯이 나스쩬까와 보낸 나흘간의 백야도 그가 반복적으로 곱씹는 회상의 대상이 될까. 누군가에게는 같이 보낸 물리적 시간보다 짧은 순간이더라도 영혼의 교감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 영혼의 대화는 몽상 속에 살던 고독한 영혼을 현실에서 잠시나마 살아있게 했으니까. 




낮도 밤도 아닌 백야의 시간은 현실과 꿈 사이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영화와 문학 사이




도스토옙스키의 중편『백야』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 <투러버스>. 두 작품에서 가장 다른 점은 주인공에게 ‘투러버스’가 있다는 것. (소설에서는 나스쪤까에게 투 러버스가 있었다면) 소설처럼 단순한 구성이 아니라 좀 더 복잡 하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주요 모티브는 닮았다. 우선 레너드가 미셸을 곤란한 상황으로부터 도와주는 장면에서 몽상가가 나스쩬까를 도와주는 장면이 떠오르고. 미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곁에서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점은 레너드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다른 ‘러버’ 산드라가 있다. 소설에는 없는 인물) 그리고 나중에 미셸이 레너드를 떠나는 이유도 나스쩬까가 몽상가를 떠나는 이유와 같다.



투 러버스. 두 사랑이 동시에 가능한가에 대해서. 그것이 소설 속 나스쩬까가 처한 상황이고 영화에서는 미셸과 레너드의 상황. 여기서 하나의 사랑을 선택했을 때 다른 사랑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가? 선택되지 않은 사람(몽상가, 레너드)의 결말은 암담하지 않다. 몽상가는 나스쩬까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하고 레너드는 미셸에게 자신의 모든 진심(사랑)을 남김없이 쏟아부었기에 깨끗하게 돌아선다. (돌아갈 사람, 산드라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깊이 아파보아서 후회가 없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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