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간의 기록 Oct 23. 2022

판단의 바깥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칠드런 액트』의 피오나 메이는 영국 고등법원 가정부 판사. 판사는 가치가 충돌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가 판별하고 최선과 차악을 결정하여 판결을 내린다.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피오나는 찬탄의 대상이다. 쟁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과 간결한 용어로 정리된 판결문은 우아하고 명쾌했다. “신과 같은 거리 두기야. 악마 같은 이해력이야. 그런데 여전히 아름답단 말이지.”      


그렇다면 가정법원 판사가 자신의 가정사를 다루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아무리 유능한 판사라 더라도 남편의 공개적인 외도선언 앞에 ‘신과 같은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피오나는 남편 잭에게 받은 충격을 제쳐두고 자신을 기다리는 무수한 판결들에 집중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혼하는 부부들의 악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태도에 고매한 논평을 하던 자신이 이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곳으로 내려와 그 삭막한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72쪽)      


일상에 균열이 가고 평소 유지하던 균형이 흔들린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 그것이 무의식이든 의식적이든 피오나 자신조차 설명할 수가 없다. 신앙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백혈병에 걸린 소년이 있다. 성인이 되는 법적 나이 18세를 몇 개월 앞두고 있는 애덤. 병원은 죽어가는 소년을 살리기 위해 강제로 수혈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고 애덤의 부모는 애덤이 자신의 신앙에 따른 결정이라며 수혈을 거부한다. 법과 신앙의 대립. 믿음과 신앙은 법의 보호 아래 존중받아야 마땅 하지만 그 믿음이 생명을 위협한다면? 법이 개입한다.     


피오나는 판결을 내리기 전, 애덤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직접 방문하기로 한다. 피오나의 병원행은 매우 이례적이고 드문 일. ‘피오나는 자신의 이 행동이 파탄 직전에 이른 한 여자가 감성에 빠져 저지르는 직업적 판단 착오인지, 아니면 세속 법정이 한 소년을 그가 믿는 종파의 신앙에서 구해내기 위해 혹은 그 품으로 인계하기 위해 시도하는 긴밀한 개입인지 판단해 보려 했다.’(125쪽)           


피오나와 애덤의 만남. 시를 쓰고 바이올린을 배우는, 지적으로 조숙하고 총명한 소년. 비범하고 사랑스러운 소년, 애덤. 피를 인간의 근본. 영혼. 생명과 마찬가지로 성스럽게 보는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애덤은 수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음까지 각오하는 애덤의 진심을 본 피오나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수혈하면 살지만 수혈하지 않으면 매우 위태로워진다고. 그리고 살지도 죽지도 않은, 몸의 기능 일부가 망가진 불완전한 회복이라는 제3의 가능성도 있다고. 대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들의 만남은 법과 종교에 관한 입장 차이를 보여 주는 데에만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남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피오나는 애덤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추어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짧은 순간만큼 판사 피오나 메이가 아니라 한 사람 자체로 애덤 앞에 섰던 것이 아닐까. 음악은 모든 언어를 넘어선다. 법과 종교의 언어를 넘어 말로는 설득되지 않는 판단과 결정을 바꾸고 마음을 움직 인다. 그 짧고도 강렬한 순간에 애덤은 자신의 미래 앞에 놓인 ‘삶과 사랑’을 본다.      


애덤을 만나고 온 피오나는 판결을 내린다.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A의 존엄성보다 소중한 것은 A의 생명입니다.’ 판결의 근거는 애덤의 복지. 그것이 칠드런 액트(아동법)의 핵심이다.          


다시 태어난 애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 피오나에게 다가간다. 자신이 피오나가 맡은 사건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지만 용감하고 과감하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 당신이 개입한 그 만남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노라고. 앞으로 펼쳐질 평범하고 좋은 것과 ‘삶과 사랑’에 대해 알려준 ‘마이 레이디’였다고. 18세 소년 애덤은 자신의 진심이 응답받길 원한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피오나가 앞으로도 자신의 삶 속에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피오나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였듯이 애덤 자신도 피오나의 삶에 개입하고 싶은 소망.      


하지만 그러한 소망은 피오나에게 가능하지 않다. 유례없는 방문이 불러온 파장을 피오나는 어떻게든 수습하기 바쁘다. 예순을 앞둔 노련한 판사에게는 이미 벌어진, 삶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니까. 피오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판결들. 결혼 문제. 일상에 균열을 확대하는 충동을 피오나는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 차단하는 것이 피오나의 선택이다.     


그들의 다른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선택의 결과 앞에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애덤의 투명하고 곧은 진심이 애처롭고 피오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안타깝다. 어떤 선택이든 완벽할 수 없다면... 선택의 무게와 결과는 각자 담당하는 것인가? (아, 슬프다!) 피오나도 애덤의 곧고 투명한 진심을 모르지 않았다. 애덤의 무구함과 순진함은 피오나를 감동 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피오나가 애덤의 진심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상황에 대한 거리두기(잭의 외도선언에 대해 어떤 액션을 취하기보다-물론 집열쇠를 바꾸기는 했으나-)가 익숙했으니까. 사랑스런 소년의 직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 애덤의 입장에서 피오나의 모습이 비겁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개입하고 나서 왜 마음대로 물러서는 겁니까? 피오나는 선택의 엄중한 무게를 알고 있었다. 판단과 선택에 따른 책임을. 다시 말하면 피오나는 애덤으로부터 도망친게 아니라 자신이 지게 될 책임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리라.    


  

아이가 보낸 편지에 답하지도 못했고 시에 담긴 경고도 해독하지 못했어. 하찮은 명성에 연연해 두려워하던 내가 지금은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 아이는 나를 찾아왔고, 그 애가 원했던 건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것,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건 ‘의미’였어. (288쪽)           

아니, 어쩌면 피오나는 애덤이 원하는 것을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판사 바깥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판결 후에는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며 남편과의 문제로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러니까 애덤과의 만남은 그 흔들림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피오나는 자신이 추구하고 지켜왔던 삶의 질서에서 벗어난 일들은 더 진전시킬 일이 아니라 수습해야 할 일이었다.           


칠드런 액트(아동법)가 애덤을 구했다면, 피오나를 향한 소년 애덤의 행동, ‘칠드런 액트’는 다시 애덤을 죽음 앞에 서게 한다.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준 존재로부터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애덤은 선택한다. 다시 발병한 백혈병에 수혈을 거부하는 선택을. 18세가 되어 소년에서 성인이 된 애덤의 결정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애덤의 마지막을 알게 된 피오나는 오열한다. 잭의 물음에 무너지면서. "그 애를 사랑했던 거야, 피오나?" “오, 잭, 걔는 그냥 어린애였어! 소년. 사랑스런 소년!”    

       

신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던 애덤은 다시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피오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피오나는 무엇을 믿었을까? 법을 근거로 우아하고 완벽한 판결문을 작성하는 피오나조차도 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정당한 법 절차에 환멸을 느낄 때마다 피오나는 가끔씩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비록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법이지만 최악의 순간에 법은 당나귀가 아니라 뱀이라는, 독사라는 생각. (74쪽)     


피오나의 법도, 애덤의 종교도 완전하지 않으며, 그들을 완벽하게 지켜주지 않는다. 어쩌면 피오나가 지니고 있던 음악에 대한 사랑. 시를 쓰고 악기를 배우는 애덤의 열정이 그들을 어느 순간보다 살아있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삶과 사랑의 순간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그들을 판사 대 소년이 아닌 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게 한 그곳. 그러나 대개 그렇듯 반짝이는 순간은 오래 지속 되지 않는다. 찰나라서 소중하고 눈부신 순간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영화와 문학 사이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체실 비치에서』에 이어 『칠드런 액트』에서도 각색을 맡았다. 하나의 이야기가 매체에 따라 얼마나 같고 다를 수 있는지 그는 실험해보고 싶었던 걸까? 소설에서 전달한 울림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전달되는지를.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서 다른 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처럼. 애덤이 연주하는 악기가 바이올린에서 기타로 바뀌었다든가, 피오나가 크리스마스 연주회 때 입는 검은색 드레스가 영화에서는 초록색 드레스라든가, 애덤이 피오나에게 처음 연락할 때 쓰는 수단이 편지가 아니라 보이스 메시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너무 사소한가? 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오나가 판결 이후 애덤을 만나는 횟수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만난다는 것, 즉, 영화에서 부각 되는 애덤의 행동을 소설에서는 그가 보낸 시와 편지가 대신한다. 소설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그의 긴 시가 영화에서는 축소되어 나온다. 이런 설정 변화는 영화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논리와 이성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던 판사 피오나가 자신에 대한 방어를 풀고 느슨하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모든 논리적 판단과 결정을 뛰어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애덤은 본다. 종교에 갇혀 있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미래 앞에 놓인 ‘삶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전 04화 그곳에 책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