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말하는 책 읽어주기의 의미이자 나, 미하엘 베르크가 그녀, 한나 슈미츠와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1958년 독일의 어느 도시. 열다섯 살 미하엘은 서른 여섯 살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미하엘은 한나에 대해 아는 것이 지극히 적지만, 누군가 책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한나는 길에서 구토하는 미하엘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준다. 얼굴을 닦아주고 죽을 만큼 아픈 미하엘을 일으켜 세우며 안아 준다. 그 이후 고마움을 전하려 한나를 찾아간 미하엘의 방문은 그에게 희미한 열병처럼 남아 한나를 다시 찾아가기에 이르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마히엘은 한나를 위해 긴 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책을 읽어준다. 책 읽기라는 여정에 등장하는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호르메스의 『오디세이아』,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 실러의 『간계와 사랑』...긴 작품들을 읽어주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책 읽어주기 다음에 이어지는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라는 만남의 의식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아 이야깃거리가 한정되어 있지만 텍스트라는 먼 여행길을 떠나며 그 안에서 공명하며 하나가 된다.
우리가 서로를 열면/ 너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는 나를 네게,/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우리가 사라지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 그러면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
미하엘은 한나와 지내며 시를 쓴다. 비록 계절이 두 세번 바뀌는 짧은 시간을 만났지만 매일 만난 두 사람의 밀도 높은 시간은 미하엘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하지만 한나에게도 같은 크기의 사건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미하엘이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인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어서다. 한나가 열일곱 살 때 지멘스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왜 스물한 살 때 군대에 들어갔는지, 결혼하지 않은 채 가족 없이 혼자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속사정도 알 길이 없다. 두 사람이 함께 간 자전거 여행에서 한나가 갑자기 과격하게 화를 내는(이 장면은 소설에만 있다.) 의문스런 행동을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므로 모든 것은 물음표로 남는다.
미하엘은 물음표를 굳이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한나가 사랑하기를 멈출까 두려워서. 그러나 두려움은 현실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한나는 어떠한 통보나 기별 없이 사라졌다. 한나의 흔적은 이미 미하엘의 몸에 새겨져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는 환영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으로 남았으므로. 한나의 냄새를 비롯해 몸이 기억하는 모든 감각들은 매일 반복된 의식과 함께 그의 몸 자체가 되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한나 이후 다른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 한다.)
책 읽어주기라는 의식이 사랑 나누기와 결합할 때 얼마나 정신적이고 육체적으로 얽히게 되는지에 대해서, 작가 슐링크는 공들여 쓴다. 한나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후 법정에서 재회한 순간, 비로소 모든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었을 때, 법학생 미하엘이 유대인의 죽음을 방조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한나에 대해 느끼는 무거운 죄의식은 바로 그 사랑과 얽혀있다. 전후 세대 미하엘이 전쟁 세대 한나에 대해 갖는 죄의식은 부모세대에게 갖는 수치심과도 연결된다. 나치에 동조했지만 마치 모두가 합의한 듯한 거대한 침묵에 대해서, 법을 공부하는 법학도 미하엘은 더 큰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하여 소설의 질문은 여기에 도달한다. 당신이 사랑한 연인이 전범자인 것을 알면 어떻게 하겠는가.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171쪽) 미하엘은 한나가 유대인의 죽음을 방조한 죄로 종신형을 받을 때 나서서 한나의 진실을 밝혀 변호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다. 한나는 자신의 문맹을 스스로 밝히는 대신 종신형이라는 과잉 처벌을 받는다. 한나에게는 유대인의 집단 죽음을 방조한 죄보다 문맹이라는 사실이 더 큰 수치였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감옥에 들어간 지 8년이 지나고 다시 한나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된다. 열다섯 살 미하엘이 아니라 이혼을 하고 딸이 있는 중년의 남자 미하엘이 되어서.『오디세이아』를 다시 읽고 슈니츨러와 체호프의 단편, 켈러와 폰타네, 하이네와 뫼리케 작품을 읽는다. 그가 마이크를 들고 다시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되어 녹음하도록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세대의 침묵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 선택한 사랑에 대한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 한나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했다는 수치심이 아닐까. 이제 책 읽어주기 다음에 사랑의 의식은 없다. 미하엘은 십 년 동안 책 읽어주기를 이어간다.
어떤 반복된 의식은 기적을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미하엘이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면서 한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천천히 읽고 쓰기 시작한다. 첫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용기있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난 해방이자 자유가 아니었을까. 책 읽어주는 ‘꼬마’였던 그에게 ‘꼬마’처럼 서툰 글씨로 편지를 쓴다. 어렵게 자신의 언어로 써서 보내지만 미하엘에게서는 답장이 없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한나의 편지는 혼잣말이 된다.
미하엘은 왜 한나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을까. 미하엘이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을 때 한나는 미하엘에게 사랑으로 응답했지만 한나가 비로소 책 읽을 수 있는 여자가 되었을 때 미하엘은 침묵으로 응답했다. 계속 카세트 테이프를 녹음해서 보내줌으로써 읽지 못하던 시절의 한나로서만 대하고 있다. 미하엘의 반복된 읽어주기 행위가 한나를 문맹에서 구했지만 한나를 완전히 구하지는 못했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수치심에서 벗어났지만, 글을 읽게 되고 자신이 한 일을 이해하게 되면서 죄의 수치심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한나와 미하엘의 이야기는 사랑으로 얽힌 전쟁세대와 전후 세대의 이야기다. 도리스 레싱은 사랑은 용서가 아니라 이해라고 말했다. 미하엘의 말처럼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라면, 나도 유죄다. 내가 한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미하엘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와의 사랑이 지나가 버린 일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하게 자신의 인생을 지배해온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은 이야기가 될 때 비로소 몸에 새겨진 한나라는 이름의 사랑과 전쟁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야기는 어른이 된 미하엘(1943년)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작가 슐링크(1944년)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영화와 문학 사이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미하엘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1인칭 시점은 영화로 옮겨갈 때 카메라의 3인칭으로 바뀌어서 영화 《더 리더》는 미하엘의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 구조 형식을 따르고 있다. 영화에서는 미하엘의 심리묘사가 축소되었고 전쟁 세대의 과거 극복에 대한 성찰 보다 열다섯 살 미하엘과 서른 여섯 살 한나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소설에 없는 한나의 죽음 장면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한나가 자살하는 순간 책을 밟고 올라서는 모습을 보자. 책상 위에는 『오디세이아』와 『전쟁과 평화』, 릴케의 시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모두 미하엘이 읽어주었던 책들이다. 반면 소설에서 한나의 자살 직후, 미하엘이 한나의 방에서 발견한 책들은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장 아메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 보고서 들이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책들을 바꿔치기 함으로써 한나의 자살을 사랑에 버림받은 여인의 죽음으로 그렸다. 그러나 한나의 죽음은 사랑 너머에 있다. 죽음의 의미마저 축소하는 것은 18년 동안 과잉 형벌을 받은 한나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