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남아있는 나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라는 뜻을 지닌 품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가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품위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품위 있는 경찰은 곧 자부심 있는 경찰이며 이러한 모습은 상대에게 호감을 사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품위는 바로 그 호감이라는 감정에 의해 망가진다. 상대에 대한 주체하지 못한 감정이 경찰로서 자부심과 품위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무너지지 않고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감정에서 멀어져야 했던 것일까?
품위와 감정이 반드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지만 직업으로서의 품위 앞에서 감정은 마치 방해요소로 보인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있는 나날』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품위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품위를 목숨처럼 여기는 스티븐슨 집사를 통해서다. 달링턴 홀 저택에서 평생 복무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지난날을 회상한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배제했던 삶을.
스티븐스가 추구한 위대한 집사의 조건은 '품위'였다. 품위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의 롤모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집사로서 저택에서 54년간 복무한 아버지였다.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품위의 화신’이었다고 말한다. ‘내 부친은 감정을 얼마나 잘 숨기셨던지, 직무를 얼마나 전문가답게 수행하셨던지’ 감정은 집사 업무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감정을 잘 숨길수록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 감정을 절제하며 품위를 지키고 완벽한 품위가 위대한 집사를 만든다. 이것이 달링턴 홀에서 30년 이상 복무한 집사 스티븐스의 ‘품위론’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져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집사로서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 그것이 ‘위대한 집사’인 아버지의 바람이었다고 믿으면서. 스티븐스는 달링턴 홀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의를 주관하느라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면서도 성공적으로 중요한 회의를 주관한 자신의 성취를 뿌듯하게 여긴 스티븐스 집사. 그의 품위는 감정에 흔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스티븐스 집사의 오른팔이자 달링턴 홀 저택의 유능한 총무 켄턴 양이 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다. 위급한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한 켄턴 양은 감정에 흔들릴지라도 무엇이 중요한지 간파하는 감각이 있다. 가령,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사상에 동조한 달링턴 경이 유대인 하녀를 해고하라고 말했을 때, 켄턴 양은 성실하게 일한 하녀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부당함 앞에 분노한다.
반면 스티븐스는 어떤가. 스티븐스는 일정한 정도 이상의 관심은 집사 직분을 어기는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호기심을 차단한다. 더이상 묻지 않고 그가 섬기는 주인, 달링턴 경의 선택과 판단을 의심 없이 따른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관심과 호기심을 외면하면 당장 편리할지 모르지만, 훗날 잘못된 충성의 방향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 아니오.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스티븐스는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달링턴 경을 섬겼다는 사실을 숨긴다. 불쾌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그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었던 삶을 부정한다. 스티븐스는 켄턴 양과 달리 자신의 오판이나 선택을 부끄러워하거나 비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달링턴 경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두둔한다. 달링턴 경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르는 여러 주장들을 허무맹랑하다고 무마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희망을 구축하는 길일테니까.
스티븐스는 눈앞에서 긴박하게 벌어지는 국제정세를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호의와 호감을 보여준 켄턴 양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눈감았다. 집사로서의 의무와 바쁨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충성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방치했다. 스티븐스로서는 최선의 대응이었지만 그렇게 방치된 감정은 훗날 그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스티븐스에게 행동을 뒷받침할 근거는 바로 품위. 그가 생각한 위대한 집사의 품위는 선을 넘지 않고 주인의 판단과 결정에 의심 없이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거창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현명하고 존경스럽다고 판단되는 주인에게 신뢰를 바치고 우리 능력이 닿는 한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기에.
이제 켄턴 양과 스티븐스의 ‘남아있는 나날’은 확연히 다르다. 켄턴 양은 달링턴 홀을 떠나 결정이나 판단을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산다. 비록 결혼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할지라도 현재는 만족스럽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켄턴 양은 자신의 방식으로 품위를 지킨다.
스티븐스는 인생을 다 바쳐서 충성했던 주인이 나치에 협력했다는 것을, 주인에게 도덕적 판단을 맡겨버림으로써 삶을 잘못 살았다는, 그 모든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이제 와서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에게 남은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난날을 후회하며 남아있는 나날을 보낼 것인가, 이제라도 집사의 자리를 이탈해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그대로 집사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하는 켄턴 양이 달링턴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스티븐스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 진다’. 그러나 그의 특기인 감정 숨기기를 발휘하여 찢긴 마음을 서둘러 봉합한다. 켄턴 양과의 재회 후에 맞이하는 저녁, 스티븐스 옆에 앉은 낯선 남자가 말한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스티븐스는 이 말에 동의한다. '이제와 인생이 바랐던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한들 무슨 소용있겠는가?' 저녁이 아름다운 이유는 저녁의 넉넉한 빛으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의 일들을 덮어주어서 인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면 쓸쓸함이 몰려온다. 집사 업무에 일생을 바친 스티븐스가 마주한 인생의 황혼이 그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지 않은 것 같아서. 자신의 상황을 애써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그가 지금껏 지켜왔던 품위와 위대함의 결과라는 사실이 나는 아프다. 그건 비단 스티븐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직업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차단하라는 말은 어쩐지 쓸쓸하다. 품위를 지키는 대가가 감정이라면 감정을 한 번 더 살펴야 한다. 감정은 품위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품위를 지키는 방향키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 <남아 있는 나날>에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그들은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집사 스티븐스와 켄턴 양을 그려낸다. 사무적인 관계이지만 두 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었던 순간이 있다. 스티븐슨 집사가 연애소설을 읽고 있던 순간, 켄턴양이 찾아온다. “제발 스티븐스 씨, 그 책 좀 보게 해 주세요.” 켄턴 양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제발 스티븐슨 씨, 당신 마음 좀 보게 해 주세요. 품위를 유지하느라 그 순간을 외면했던 스티븐스 집사는 이제야 비로소 다시 돌아본다. 어떤 순간은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된다. 그때가 결정적 순간이었음을. 어떤 깨달음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