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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25. 2022

영화와 문학 사이


영화가 된 문학이 있다.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영화가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와 문학은 오래전부터 친한 사이였고 둘 사이를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작가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이 영화와 문학의 친연성을 밝혀 왔다. 영화 감독이 된 소설가들도 적지 않다. 영화에게 소설이란 이야기를 배태하는 자궁일까. 어떤 영화는 문학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영화 관객 수가 문학 독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가 된 지금, 잊혔던 문학 작품이 영화를 통해 발굴되고 다시 태어난다.           



시대성을 반영하는 영화는 오래된 고전을 재해석하여 관객들과 만난다.  소설 독자는 영화를 보고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한 주인공이랑 다른데? 내가 알던 내용이랑 다른데?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더라도 차이는 불가피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발동한 3차원의 상상력이 영화에서 2차원 평면 화면으로 옮겨진다. 700 페이지 넘는 소설이 영화 러닝 타임 두 시간으로 압축된다. 압축을 위해 어떤 부분은 생략, 축소되는 반면 어떤 부분은 선택과 집중으로 도드라진다.  



소설에서 모호한 부분이 영화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이 어떤 옷을 입는지, 인물이 사는 집의 벽지는 무슨 색인지, 소설이 말하지 않는 사소한 여백을 채운다. 내용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이 감춘 부분을 영화가 보여준다. 혹은 소설의 형식을 영화 문법으로 바꾼다. 불가피하거나 의도적 변형은 영화만의 새로운 해석이 된다.            



영화와 문학 중 무엇을 먼저 볼 것인가, 이 해묵은 질문에 영화와 문학을 동시에 애호하는 사람은 답하기가 고민스럽다. 무엇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인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미 책을 읽었다면 영화는 다시 읽기가 된다. 책은 다시 읽을 때 새로운 의미가 발견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반복해서 읽을 때만이 작품을 보다 깊게 만날 수 있다. 소설 원작 영화는 소설 다르게 읽기이며 새롭게 보기. 나아가 작품을 깊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읽기의 대상이 된다. 문학이 말로 된 언어라면 영화는 시각적 언어. 문학이라는 언어를, 영화라는 언어를 읽고 보고 듣는다. 올바른 감상은 섬세한 눈을 갖는 것 만큼이나 민감한 귀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눈과 귀의 협업이자 상호작용. 분석자의 눈이 아니라 애호가의 눈으로 작품을 보고 읽는다. 냉철한 분석보다 진지한 애호가 깊은 이해를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영화가 된 문학을 함께 읽을 때           



영화와 문학 읽기가 입력과정이라면 읽은 후 감상 나누기는 출력과정이다. 말하기와 쓰기라는 출력. 간단히 좋다 나쁘다 말하거나 SNS에 짧은 감상평을 남긴다. 혹은 영화와 원작을 비교한 200자 원고지 열 장 분량의 글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의 작품을 책과 영화로 만난 후 모임에서 감상을 나눌 수 있다. <영화 속 문학 읽기> 모임에서는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면서 한 작품을 세 번 만난다.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다니,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다. 혼자 한다면 오래 할 수 없다. 하지만 함께 하면 할 수 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주목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듯 영화와 문학 사이를 거니는 풍경은 저마다 다르니까. 활자에 익숙한 눈이 있고 영상에 익숙한 눈이 있다.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주관적 체험일 수밖에 없다. 주관적 시선을 나누면서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것. <영화 속 문학 읽기>를 하는 이유다.      



문학 읽는 시간에서 만난 영화 같은 순간 



개별적인 시선과 말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저마다 고유한 형태로 자리한다. 개별적으로 남는다면 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개별적인 텍스트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을 깊이 알수록 나를 더욱 알아가는 신기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나? 다른 이는 그냥 지나쳤던 대목에 내가 반응한다면 그것은 나를 구별하는 지점이 된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시간이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내재한 무언가를 문학이 표현해주기 때문이리라. 아 맞아. 바로 그거였어. 그렇게 포획된 문장은 나를 구성하고 설명하는 텍스트가 된다.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는 발견과 새롭게 알게 된 나를 만나는 기쁨. 문학에 대한 앎은 나에 대한 앎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다.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면서 더 멀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일 수 있도록. 자신이 지닌 고유한 시선을 지킬 수 있도록 지켜본다. 나의 시선을 지키고 목소리를 보다 단단하게 키워갈 수 있도록. 내가 왜 다르게 생각하는지 점검하는 기회가 되어서 나의 입장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본다.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하여 알게 된다. 이것은 소통과 공감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보다 정확하고 선명하게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 다름을 확인하면서 나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 고유한 감상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목소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렇게 될 때 나의 목소리는 좀 더 견고해지고 단단해 진다.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홀로 또 함께 할 수 있다.           



문학을 읽으면서 만난 영화적 순간이 있다. 어떤 문장이 나를 환한 빛을 비추는 순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보게 하는 환기의 순간. 나의 잠들어 있던 기억을 꺼내는 순간. 영화와 문학이 재창조한 삶을 나누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뒤죽박죽 떠오른 생각의 편린이 퍼즐조각처럼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대화가 주는 활기와 생생함은 모임의 리듬을 만들고 리듬을 타며 어떤 이야기는 확대되고 깊어진다. 목소리가 떨리고 긴장하여 더듬거린다. 침묵하다가도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줌인 줌아웃. 모임이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러한 순간이 우리를 묶어준다. 영화가 끝나면 잔상이 남듯이. 흩어진 시공간이 하나로 수렴되는 순간. 이것이 바로 영화적 순간 아닐까?     



영화가 된 문학 이해하기      



이 곳에 모인 스물 한편의 작품은 고전문학부터 현대문학까지 아우른다. 괴테(1749-1832), 제인 오스틴(1775-1817), 도스토옙스키(1821-1881), 버지니아울프(1882-1941), 하인리히 뵐(1917-1985), 필립 로스(1933-2018), 베른하르트 슐링크(1944-), 이언 매큐언(1948-), 가즈오 이시구로(1954-).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이는 작가들이지만 그들의 작품은 모두 영화화된 세계문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처럼 모든 작품이 영화화된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읽고 싶지만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때, 영화는 좋은 우회로가 된다. (어디까지나 영상에 친숙한 경우가 해당되겠지만)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 작가와 작품에 따라붙는 수식어를 직접 확인하고 싶을 때,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 문학을 각색한 영화를 보며 작품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하여 영화 속 문학 읽기라는 이름처럼 문학 읽기에 방점을 둔다. 2020년부터 시작한 <영화 속 문학 읽기> 모임을 하며 얻은 이해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글을 모아 보니, 사랑이라는 감정, 순간과 시간, 존재와 정체성 이라는 주제가 보였다. 어떤 글은 주제가 겹치기도 하지만 구분하여 배치해 보았다. 글 마지막에 영화와 문학 사이에서 눈여겨볼 차이를 ‘영화와 문학 사이’라는 이름으로 담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다. 여기 모인 글이 무엇을 읽을까, 어떻게 읽을까에 관한 하나의 제안이자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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