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휘청거릴 때가 있다. 나와의 관계에 따라 동요의 크기가 결정될 것 같지만, 실제로 죽음을 맞닥뜨리면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유명인의 뜻밖의 죽음도 내 마음 한구석에 휑하고 바람을 일으키니까. 사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미디어의 효과는 유명인이 마치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일으켜, 아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마냥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뜻밖의 죽음이 자살인 경우, 마음의 동요는 동조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요가 마음의 파동이라면 동조는 몸의 파동. 유명인의 자살에 동조하는 사례가 얼마나 얼마나 많았으면 사회 현상으로 명명되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현상을 ‘베르테르효과’라고 말한다.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베르테르는 그렇게 자살의 아이콘이 되었다. 정치, 과학,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괴테가 이십 대 무렵 발표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인기를 증명하듯 베르테르의 자살에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동조했다. 베르테르의 슬픔과 고뇌에 공감하면서. 베르테르는 당시의 유명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실, 베르테르는 실재 인물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일 뿐 아닌가. 실재의 자살이 아닌 소설 속 자살을 실재 사람들이 모방한 것인데 그만큼 소설이 주는 위력이 강력했던 것일까? 베르테르의 무엇이 젊은이들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진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좌절과 슬픔으로 인한 자살로만 간단히 정리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문학사에서 죽음에 이르는 사랑은 다른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친구 빌헬름에게 쓴 편지이지만 친구의 답장은 나오지 않는다. 오직 베르테르의 목소리만 등장해서 마치 연극의 방백, 편지는 수신자 없는 일기처럼 읽힌다. 베르테르는 폭풍 같은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며 감정의 추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자기 검열 따위는 없다. 질풍노도 문학의 선두 주자답게 감정의 폭발이 핵심이다. 나도 내 마음이 어지러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지 못할 때, 누군가 빼곡하게 적은 감정을 읽는다면,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하게 되지 않나. 특히 봉건적이고 폐쇄된 사회 분위기에 젖어있던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의 분출된 감정을 읽으며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베르테르는 빌하임이라는 소도시에서 로테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진다. 안타깝게도 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으나 이미 시작된 사랑은 제어하기가 어렵다. 자연을 즐기며 평화롭던 베르테르의 마음 상태는 로테를 만나 흥분으로 한껏 고취되고 고양된다.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그녀 앞에서 일체의 사물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로테가 베르테르의 세계 전부가 된다. 반대로 말하면 로테를 뺀 나머지는 없다.
한껏 고양된 감정은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의 존재가 선명해질수록 추락하기 시작한다. 베르테르가 즐겨 읽던 호메로스는 더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에게 평안을 주었던 자연도 더 이상 평안하지 않다. 사랑은 행복인 동시에 불행이 된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삼각관계를 유지할 수 없던 베르테르는 로테를 잊고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는 방편으로 공사로 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그러나 일하는 곳은 어쩐지 맞지 않고 그를 아끼던 백작의 집에서 모욕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추락하는 마음 상태를 추스르고 환경을 바꾸려 한 결정이었지만 오히려 더 악화만 되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내 손에 칼을 쥐고, 숨막히도록 답답한 이 가슴에다 구멍을 뚫어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던가!’
다시 빌하임으로 돌아온 베르테르에게 로테와의 재회는 이미 예정된 상황을 더욱 확인시켜 줄 뿐이다. 베르테르에게 출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모든 길이 막힌 것만 같을 때, 베르테르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베르테르는 죽음을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자살은 알베르트와의 논쟁에서 암시된다. ‘고통의 한도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지요. 나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 아무리 신통한 치료를 한다 해도 생명 활동을 다시 되살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베르테르는 몸의 병으로 죽는 만큼 마음의 병으로 죽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고 항변한다. 마음의 병은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병’.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권총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날 열두 시를 치는 종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다. 로테 안녕, 안녕! 그때 베르테르가 입고 있던 옷은 푸른색 연미복에 노란 조끼. 로테와 만난 첫날 무도회에서 입고 있던 옷이었다. 베르테르에게 죽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열리지 않는 미래 사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탈출구 혹은 도피처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보편적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자유롭게 표현한 베르테르의 등장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250년이 지난 지금 지식의 양은 늘어났고 베르테르의 말대로 누구나 지식을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만큼 마음의 깊이와 폭도 늘어났는지는 의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을 둘러싼 감정은 얼마나 달라졌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며 감정을 토로한 베르테르. 마음의 대변자, 베르테르. 그의 의미를 거기서 찾는다.
영화와 문학 사이
편지 형식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베르테르의 목소리로만 채워져 있어서 로테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베르테르가 죽었을 때 조차 로테의 슬픔은 거의 언급되지 않을 만큼 로테의 모습은 제한적이다. 이에 대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훗날 로테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나왔다고 한다. ‘젊은’ 괴테의 삶을 다룬 영화 <괴테>는 로테를 좀 더 입체적으로 그린다.
괴테는 로테에게 시로 마음을 표현하고 로테는 괴테가 짓는 시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바쁘게 지내던 로테가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의 언어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얼마나 기뻤겠는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문학적 코드는 두 사람을 긴밀하게 이어준다. 그럼에도 로테는 이미 예정된 약혼자 알베르토와 결혼하지만, 베르테르와의 사랑은 문학 속에서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괴테의 문학적 소양을 높이 샀던 로테는 괴테가 불태우라고 말한 원고를 몰래 출간한다. 그 책이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세상을 떠나간 베르테르를 그저 슬퍼하는 로테에서 좀더 능동적인 로테로 탈바꿈시켰다. 영화가 로테에게 부여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