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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11. 2022

제인 오스틴이 특별한 이유

제인 오스틴의『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의 모든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씩. 마흔한 살 무렵 요절하여 영화화할 수 있는 작품 수가 여섯 편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오만과 편견』의 경우 무려 열 번 이상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환되는 이름, 제인 오스틴. 무엇이 그토록 제인 오스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까?



작품의 중심 소재인 18세기 영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연애와 결혼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로 일컬어지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의 불멸성을 말하기에는 어쩐지 허전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즐겨 산책하는 드넓은 정원을 밟아본 적 없어도,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무도회를 경험한 적 없어도,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 변화와 대화는 지금 읽어도 공감할 수 있으며 신선하기까지 하다. 얄미운 인물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웃음을 자아내고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내는 유머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비결이 아닐까?  



제인 오스틴이 성장하는 내내 유럽은 전쟁에 휩싸여 있었고 당시 영국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는 등 격변하고 있지만 제인 오스틴 소설은 젠트리 계급의 일상에 주목한다. 정찬 모임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무도회에서 누구와 춤을 출 것인가 하는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문제를 통하여 인간 심리를 예리하게 묘파 한다. 그리하여 알게 된다. 사소한 문제더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을. 전염병 시대를 지나고 전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하기 바라며, 사랑하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어떻게 사소하기만 한 일일까.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오만과 편견> (2006)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다들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오만과 편견』(펭귄클래식 코리아, 김정아 옮김)의 첫 문장이다.  소설은 이러한 진리를 반박하거나 껴안으면서 나아간다.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에 적극적으로 기대는 인물은 베넷 부인이다. 베넷 부인의 ‘평생 사업’은 다섯 딸들의 출가이므로 수입이 많은 빙리 씨가 동네로 이사 왔다는 소문에 들썩일 수밖에 없다. 딸들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남’과 결혼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다들 인정하는 진리’를 통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재산 많은 남자의 청혼을 가난한 여자가 거절하는 것은 진리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베넷 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리지)에게 두 남자가 청혼한다. 한 사람은 베넷가의 재산을 상속받는 (딸들은 상속받을 수 없었으므로) 친척 콜린스 씨. ‘성직로서의 권위 의식, 오만과 아첨, 잘난체와 비굴함의 혼합물’인 콜린스 씨는 자신의 청혼이 관대함의 표현이라 여기며 엘리자베스에게 망설임 없이 청혼한다. 당연히 받아들여지리라 믿었던 청혼이 거절당하자 그는 당황한다.      



여기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는 또 다른 남자, 다아시가 있다. 그는 콜린스 씨나 빙리 씨 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귀족으로 역시 당연히 자신의 청혼이 수락되리라 믿는다. 당신 집안의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이 너무나 강렬하여 청혼한다는 다아시의 '오만한' 청혼을 리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날카롭게 각을 세우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닮았다. 어떤 종류의 가식도 혐오하며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너무나 비슷했던 것이다.    


      

다아시는 오해를 바로잡으려 편지를 쓴다. 대화보다 더 깊은 속마음을 전해주는 편지를 받고 리지는 읽고 또 읽는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한심했었다니!’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분별력 있다고 자부하던 리지가 깨닫는 순간이다.






서로의 마음이 어긋난 사건 앞에서도 소설의 분위기는 결코 심각해지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은 리지의 마음이 쉽게 다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실망스럽고 울적한 일이여, 모두 안녕! 바위와 산들에 비하면 남자들이 다 뭐예요? ) 그것은 제인 오스틴이 부여하는 자존심이 아닐까. 다아시는 리지의 모습이 신선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분과 재산을 보고 알아서 몸을 굽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차게 맞서는 '활달한 지성'(the liveliness of your mind, 혹은 '마음의 생기')이 리지에게 있었으니까.      



리지의 다아시에 대한 감정이 극도의 미움에서 호감으로, 호감에서 사랑으로 발전하여 결혼에 이른다. 신데렐라 스토리로 볼 수 있겠지만, 당사자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신은 ‘신데렐라(의 본래 뜻은 재투성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아시와의 만남을 저지하며 가족을 모욕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 캐서린 영부인을 향해 이렇게 항변하는 리지 아닌가. ‘그분은 신사고, 저도 신사의 딸이니까요. 그 점에서 우리는 동등해요. (...) 전 단지, 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영부인이건 혹은 저하고는 관계없는 누구의 의견이건 상관하지 않고, 제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동할 작정일 뿐입니다.'     





다아시와의 결혼을 알게 된 언니 제인은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 리지! 애정 없이 결혼하는 일만큼은 말아야 돼. 너희가 느껴 마땅할 만큼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정말 확신하니? ” 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정 있는 결혼'은 당시 널리 알려진 진리(재산 여부로 결정되는 결혼)에 반하는 것이었다. 리지의 절친, 샬롯을 보자. 낭만은 과욕이라 여기는 샬롯은 리지가 거절한 콜린스 씨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지만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반대로 애정 있는 결혼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리지와 샬롯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을 한다. 행복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리지가 보여주는 당당함은 지금 보아도 신선하고 놀랍다.  어떻게 그렇게 자랐을까? 아빠 베넷 씨는 어린 딸들이 경거망동한 모습을 보여도 그러한 행동을 제지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권위적인 모습과 반대이며 오히려 거리를 두면서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너희들 좋을 대로 해라" 체념인지 달관인지 모를 베넷 씨의 태도는 베넷 부인과 대조되며 그들은 각자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공존한다. 아마 계속 그러할 것이다. 베넷 부인은 여전히 소란스러울 테고 베넷 씨는 그러한 부인의 등쌀을 피해 자신의 서재로 조용히 몸을 숨길 것이다. 하지만 나설 때는 나서는 인물. 베넷 부인이 리지에게 가한 막무가내식 결혼을 막아준 것은 베넷씨였다. 리지는 엄마 베넷 부인의 압박을 받아도 아빠 베넷 씨의 포용과 애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소설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은 캐서린 영부인이다. 재산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권력을 휘두르는 근거가 재산에 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인 것 같아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아시가 돋보인다. 막대한 재산을 지닌 다아시는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으며 리지를 만나고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평소에 그였다면 굴욕이라고 여겼을 법한 일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몸을 낮춘다. 빈털터리 위컴을 돌보는 것은 그의 의무가 아니지만 시간과 수고, 돈을 들여 도피행각을 벌인 리디아와 위컴이 살아갈 방도를 얻도록 재정적 지원을 한다. 다아시를 변화시킨 게 사랑의 힘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이 제인 오스틴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이다. 그러한 사랑은 당시의 '진리'를 비웃으며 당당히 결혼의 이유가 된다.      











영화와 문학 사이      




소설 속 인물은 영화를 통해 재탄생한다.  1995년 BBC에서 TV시리즈로 만든 <오만과 편견>에서 콜린 퍼스가 다아시를 맡았다. 콜린 퍼스가 연못에 빠져 셔츠가 젖는 장면은 제인 오스틴다운 설정이 아니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역대 '다아시들'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콜린 퍼스 표' 다아시를 탄생시켰다.   

   




영화로 만들어진 <오만과 편견>을 모아서 보면 그 변화가 뚜렷하게 보일 것 같다.  영화와 문학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뿐 아니라, 영화와 영화 사이에 생기는 시대 변화까지 말이다.『오만과 편견』에서 리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리지는 '모자에 장식을 달고' 있다. 드라마 <오만과 편견>(1995)에서는 리지가 손에 꽃을 들고 있지만 키아라 나이틀 리가 맡은 리지(2006)는 책을 읽고 있다. 나에겐 모자에 장식을 달고 있는 리지나 손에 꽃을 든 리지 보다 책을 읽고 있는 리지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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