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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Oct 25. 2022

잃어버린 아이의 시간을 찾아서

이언 매큐언의 『차일드 인 타임』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하는 사이, 세 살 딸아이가 갑자기 사라진다. 봉투를 받고 고개를 돌리니 아이가 없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언 매큐언의 『차일드 인 타임』은 유명 동화 작가 스티븐의 딸 케이트가 실종된 사건으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실종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실종된 아이의 행방과 아이를 찾는 고군분투를 기대하게 되지만,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간다. 아이의 실종은 하나의 은유이자 독자를 끌어당기는 장치. 아이를 잃어버리고 난 이후를 살아가는 부부, 잃어버린 유년기를 찾고자 하는 친구, 정부의 아동 정책 그리고 시간의 본질까지, 이언 매큐언은 아이(차일드)와 시간(타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능숙하게 엮으며 여러 이야기를 펼친다. 



하나뿐인 딸 케이트가 사라지고 스티븐과 줄리 부부는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서로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어떤 슬픔은 입에 올리기조차 버거워서 나눌 수가 없다. 스티븐과 줄리는 딸 케이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워서 서로의 슬픔에 닿을 수가 없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내기는 가혹했을 것이다. 아이의 부재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냈을 테니. 줄리는 시골 외딴 집으로 떠나고 스티븐은 집에 홀로 남는다. 아이의 부재가 그들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지만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그들이 슬픔을 통과하는 방식이었다. 



슬픔의 통로가 있다면 슬픔은 슬픔으로 연결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 수천 년 된 슬픔이었다.’ 스티븐은 줄리가 지내는 시골 외딴 집으로 가는 길에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넘어짐이 마치 어떤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 스티븐은 홀리듯 <더 벨>이라는 공간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창가너머로 보게 된 것.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오래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 혹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순간.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도 모두 미래의 시간 안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되어 있다.' (219쪽) 



그러니까 그곳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차이가 없다.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스티븐을 보았고 스티븐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젊은 시절의 부모를 본 것이다. 


꿈이 아니라면 어려운 물리학 이론을 총동원해야 설명가능한 순간. 그 순간은 엄마와 스티븐에게 결정적인 경험이었다. 혼전 임신으로 출산을 망설였던 엄마는 창문에 비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출산을 결심하게 되니까. 처음으로 그녀는 별개의 개인이라는 개념, 자신의 생명으로 지켜내야 하는 생명이라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329쪽) 엄마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사랑하게 된다. 만약 그 기이한 마주침의 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티븐은 태어나지 못한, 잃어버린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동이 한 사람이자 존귀한 생명이라는 것.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다. 매 챕터가 시작할 때마다 서두에 등장하는 <공인 아동 보육 안내서>는 아동보육위원회가 만드는 책자이다. 총리가 특별 관리하는 아동보육위원회에 스티븐이 아동 작가로 참여하게 된다. 스티븐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동화 『레모네이드』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려나갔다. 『레모네이드』를 출판한 사람은 찰스 다크. 그는 『레모네이드』의 열렬한 팬이자 스티븐의 좋은 친구다. 찰스는 말한다. ‘이 책은 작가가 영원히 존재하는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유년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출판 경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기업가이자 촉망받는 정치인이 된 찰스는 친구 스티븐을 아동을 위한 정책 위원회에 추천한다. 아이를 잃은 아빠 스티븐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을 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다. 



위원회는 매 회의를 거쳐 <공인 아동 보육 안내서>를 작성한다. 모든 아이를 위한 정책. ‘잃어버린 아이는 모두 우리의 자식이다’라는 말에 기대면 안내서를 만드는 일은 결국 모든 아이를 나의 아이처럼 생각하는 일. 그러나 아동을 위한 정책인데 그곳에는 아동이 없다. 어른들이 결정한다. 스티븐은 위원회 회의에서 하는 일은 주로 몽상에 빠지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자 조롱으로 읽힌다. 실제로 위원회는 형식이자 허울이었고 안내서는 이미 처음부터 작성되어 있었다. 



정부가 어른의 세계에 대한 비유라면 찰스는 성공적으로 어른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아동보육위원회가 만드는 안내서를 보며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 옳은가. 언제부터 읽기, 쓰기를 배우고 무엇이 아이들에게 가장 옳고 적합한 것인지 어른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결정을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인가. 찰스는 위원회가 시작하는 동시에 정계를 은퇴한다. 그리고 그의 내면 아이를 찾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깊은 숲속으로 간다. 



성숙함과 원숙함의 전형이었던 찰스 부부가 시골의 숲으로 간다는 건 스티븐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찰스의 잃어버린 내면 아이(유년시절) 찾기는 자신이 진짜 잃어버린 딸 케이트 찾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아이(차일드)를 잃어버린 스티븐과 아동기(차일드후드) 를 잃어버린 찰스. 찰스는 아동기를 되찾고자 아이가 된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 잃어버린 아이의 시간을 찾아서. 



유년기는 언젠가 반드시 끝나지만 어떠한 형태로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시간’이다. 유년기라는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찰스에게 유년기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깊숙이 있었고 스티븐의 동화책 『레모네이드』가 불을 지폈다. 때문에 어른 아이 찰스가 지은 나무집에 스티븐이 찾아왔을 때 웰컴 음료로 ‘레모네이드’를 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스티븐은 현재에 있지만 과거를 살고 찰스는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고자 했다. 한마디로 찰스는 촉망받는 정치인으로서의 어른의 시간과 근심과 책임 없는 어린이의 시간을 동시에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과 아이의 시간은 동시에 허락되지 않았다.



이언 매큐언은 아이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차일드 인 타임』이 1987년에 발표되었을 당시, 매큐언의 첫째 아이는 세 살이었다고 한다. 실종된 케이트의 딸의 나이도 세 살이다. 그러니까 매큐언을 곧 스티븐으로 볼 수 있을까. 작가이자 한 아이의 아빠인 스티븐(매큐언)은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바라본다. 흔히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하듯,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은 아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한 정책조차도. 



길거리에 떠도는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주고 외투를 벗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매큐언은 스티븐을 통해 보여준다. 유년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한 사람의 인생에게 결정적인 시간. 언젠가 희미해지는 시간일지라도 지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시간. 그러한 시간 속에 있는 아이(차일드 인 타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대답을 스티븐과 줄리 부부가 새로 찾아온 생명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찾는다. '딸을 잃어버린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새로운 아이를 통해 딸을 사랑할 것이며 그 아이가 돌아올 가능성에 마음을 닫지 않기로 했다. (...) 바로 이것, 이 증식,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 생명의 물질이 우리가 가진 전부로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는구나 (413쪽)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영화와 문학 사이 





순간을 어떻게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       


         

스티븐의 친구이자 찰스의 부인 셀마는 시간의 본질을 연구하는 물리학자. 셀마가 말하는 물리학에 관한 대화가 영화에서는 생략되었다. 독자를 지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물리학 이론은 『차일드 인 타임』이 아이가 사라진다는 사건보다 시간에 관한 탐구라는 것을 지속해서 상기시킨다. 영화에서 생략된 장면 중 하나는 스티븐 눈 앞에 벌어지는 트럭사고. 스티븐은 사고의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늘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이렇게 시간이 느려지는 가운데 뭔가가 새로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끔찍할 뻔한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순간. 죽음과 삶을 결정하는 것이 지극히 짧은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어떤 장면은 영화로 옮기기에 너무 소설적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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