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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Sep 10. 2019

나의 쓸모를 발견하기 위하여

『토지』가 건네는 말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을 읽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토지』를 읽는 과정은 독서라기보다 하나의 경험이자 체험이었다. 나남 출판사에서 나온 토지 전 21권을 읽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도중에 손을 놓고 다른 책을 보며 지낸 시간까지 합쳐서다. 독서 근육이 만들어지는데 일정한 독서량과 지구력이 필요하다면 나의 독서 근육은 『토지』에서 만들어졌다.      


구한말인 1897년부터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1945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 등장인물 600여명에 이르는 이야기가 완성되는데 26년이 걸렸다. 이 거대한 산맥 같은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읽는 동안 책을 덮고 가만히 가다듬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감동과 슬픔으로 엉엉 울기도 했다. 눈이 스르르 감기는 장면도 있었고 끝없이 새로 등장하는 인물에 현기증도 났다. 긴 마라톤을 혼자 달리는 기분이었다.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당시 내가 찾을 수 있는 책은 <토지 인물사전>이나 <토지 용어사전>이 전부였다. 나는 그보다 토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그런 책을 원했다.      




그래서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이 반가웠다. 저자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대학에서 ‘고전 읽기: 박경리 토지 읽기’를 강의했다. 국문학생을 위한 수업이 아닌 의예, 기계공학 학생까지 듣는 열린 교양강좌로 600여명의 학생들이 들었고 강의 평점 최고점을 받았다고 한다.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이기에 토지를 처음 접하는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한다. 소설 『토지』 위에 얹는 저자의 해석과 설명은 지적이고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토지』를 읽었던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잊고 있던 영상을 다시 돌리듯 『토지』속의 인물들을 만났다. 책에 등장하는 600여명의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다. 각양각색의 인물이 보여주는 삶이 곧 『토지』이고 『토지』의 전부다.      


표면적으로 최참판댁 무남독녀 서희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서희가 주인공은 아니다. 작가는 마치 모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듯 인물 한명 한명의 생과 죽음을 쓴다. 심지어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삶에 경중이 없다. 최참판 댁 윤씨 부인의 죽음이나 무당 월선의 죽음은 동일하게 다루어진다. 오래도록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서희와 길상의 결혼도 대수롭지 않게 거의 자세한 언급도 없이 넘어간다. 작가는 개별사건과 인물의 경중을 분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과 사건 모두 역사라는 물결 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토지』를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삶은 없다. 『토지』를 읽고 나서 한 뼘 자랐다는 느낌이 든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고 정리될 수 없지만 삶이란 원래 그렇게 수많은 모순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토지의 인물들은 말하고 있다. 원수로 지내는 인물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토지의 많은 인물들은 운명의 굴레에서 비관하거나 순응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토지』 내내 악역으로 등장하는 조준구. 조준구만큼 탐욕스런 홍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꼽추도령, 조병수. 그는 극악무도한 부모와 정반대로 맑고 유리 같은 선한 성품을 지녔다. 부모의 나쁜 짓으로 얻은 재물과 재산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여러 번 자살시도를 하는 비극적인 인물. 하지만 생명에의 집착으로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버릴 만큼 괴로워하는 인물이 조병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부모와 결별하며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목수 일을 배우며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하고 가족까지 꾸리며 자긍심을 얻게 된다.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63p) 기나긴 세월 끝에 조병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인정한다. 나는 그러한 삶을 능동적 순응이라 부르고 싶다. 꼽추라는 혹과 부모라는 혹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자기 삶을 창조하는 것. 그는 나무를 다루는 목수 일을 통해 삶이라는 예술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눈물과 비탄과 애통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두 발로 섰다. 수많은 인물 속에서 그가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다.      





어디 가서 토로하고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느낌들을 『토지』 속 인물들은 겪고 있었다. 『토지』를 붙잡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된게 아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설명되지 않는 일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토지』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바다에 빠졌다.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삶에는 어떤 운명적이고 심연과도 같은 함정이 있게 마련’이기에. 나는 인물들이 겪는 함정에 나의 함정을 대입해 보며 그들을 이해했고 나를 이해했다.           


신분제라는 굴레와 식민지 역사의 비극, 하동 평사리부터 간도에 이르는 공간의 이동 속에서 그들은 여러 갈래의 삶을 보여준다. 하나의 길이 아니라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저마다의 길을 저마다의 걸음으로 타박타박 걸어간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모든 삶은 저마다의 쓸모를 발견해 간다고 이 책은 말한다.                    

토지는 한국문학의 하나의 산맥이자 봉우리로 서있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님에게 글쓰기의 쓸모는 결국 나의 쓸모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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