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분을 밝히지 마라?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 친구 엄마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첫째가 유치원 졸업할 때까지 첫째 친구 엄마들과 자주 어울렸다. 육아휴직을 하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엄마들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나는 휴직 전까지 직장 다니고 애 키우느라 바빠서 엄마들과 ‘놀이터 수다’나 ‘브런치’ 같은 것을 해보지 못했다. 내게는 그런 것들이 새로운 경험이자 호기심을 유발하는 신세계였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하원시킨 후,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간식 챙겨주며 벤치에 앉아 얘기를 한다. 그게 너무 해보고 싶었다. 실제 해보니 재밌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고 같은 동네에서 또래 아이 키우는 엄마들과 고충을 나누며 위안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학교-집-학교-집만 왔다 갔다 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는데 엄마들은 동네 저렴한 마트나 부동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활동을 함께 하는지 정보를 얻고 배우기도 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 친구 엄마들이 남편보다 힘이 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 친구 엄마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는 지금 휴직 중’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직업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공무원이라고 둘러댄다. 사실 나는 공무원이다. 그것도 국가공무원. 그러니 ‘나는 공무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 교사는 일반 공무원과 별도로 인식된다. 실은 나뿐 아니라 많은 엄마교사들이 ‘나는 교사다’라고 말하기를 꺼린다.
일하는 다른 엄마들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한다고 자세히 말하지는 않는다. 그냥 직장 다닌다고 하거나, 회사 다닌다고 한다. 회사원이라고 LG 다녀요, 현대자동차 다녀요,라고 말하거나 약사예요, 세무사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 번 만나고 친해져도 무슨 일 하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도 마찬가지다. 그냥 공무원이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조금 친해지면 이상하게도 내 직업을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우리 직업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감추기 힘든 것 같다. 어떤 회사인데 ‘잘리지 않고 휴직을 그렇게 오래 해도 되는가’하는 부분에서 가장 쉽게 발각된다. 출퇴근시간, 방학 등에서도 드러난다. 종종 말투와 옷차림에서도 ‘선생 태’가 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친해지지 않아도 어쩌다 보면 학교 선생이라고 말하게 되는데 이게 영 개운치 않다.
개운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활동의 제약이 커지기 때문이다. 교사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서 거주할 경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으면 상당히 불편하다. 같은 아파트 주민이 학부모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자면, ‘땡글이 엄마, 00 학교 교사잖아. 마트에서 봤어. 귤 사는 것 같던데.’ 같은 이야기를 나를 아는 동네사람들이 하게 된다. 퇴근하는데 나의 아이들과 그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면 아이 친구들의 부모님 앞에서 교사인지, 친구 엄마인지 애매한 입장에 처하게 될 때도 있다. 이 정도야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니 괜찮다.
나는 근무하는 학교 바로 옆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었다. 게다가 애까지 셋이라 동네사람들과 이래저래 얽히는 일이 많았다. 우리 집 둘째와 친한 친구의 오빠가 5학년 때 우리 반이었고, 둘째가 다니는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내가 그전 해에 담임했던 아이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아이 친구 엄마가 학부모였고, 학부모가 우리 집 아이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막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녔던 아이 M이 우리 반이 되었다. 어린이집에서 막내와 친한 친구 N의 엄마와 내가 친하고, 또 M엄마와 N엄마가 친하다. 윗집에 살던 집과 층간소음으로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는데 그 집 첫째 Q가 우리 첫째랑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고 Q의 친구들도 다 우리 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 첫째와 Q의 친구들 역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윗집 엄마는 자신과 친한 동네 엄마들에게 내 얘기를 안 좋게 하고 다녔는데 그 엄마들이 Q친구들의 엄마였다. Q친구들의 엄마는 모두 우리 학교 학부모였다.
한 동네 살다 보면 남들이 내 얘기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뭘 그렇게 신경 쓰냐 할지 모른다. 그런데 ‘교사’라는 사람이 갖는 자의적, 타의적 기대치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교사의 권위가 실추되었어도 사람들은 교사에게 교사로서의 행동기준이랄까, 품위랄까 그런 것을 요구한다. 교사 스스로도 그런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것을 충족하나?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하고 나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무엇보다 아이 친구 엄마나 나 스스로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고 관계를 맺게 된다. 아이 친구엄마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만날 수도 있는 나에게, 자신의 아이 담임선생님과 친할 수도 있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기 어려울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학부모가 될 수도 있는 동네 엄마들에게 마음을 터놓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신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직업 중에 하나일 뿐인데 왜 말을 못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말할 기회가 되거나, 들킬 것 같으면 내가 먼저 말한다. 그래도 여전히 가능하면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학교 근처에 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이유는 교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돌려 깎이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에 다녔다.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 중에 하나가 ‘선생님’이었고 내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렇다 보니 학교와 교사에 대해 관심이 많고 아는 것도 적지 않다. 물론 학교라는 조직 속에 직업인으로 들어오면 겉에서 보는 학교와 안에서 경험하는 학교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어쨌든 사람들에게 학교는 매일 겪었던 공간이고, 교사는 사람들이 매일 접했던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교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정을 품고 있다. 감사하다, 재밌다, 궁금하다, 같은 감정도 있겠지만 이상하다, 짜증 난다, 지루하다, 답답하다, 재수 없다 까지 부정적 감정도 많은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특수성이 추가된다. 부모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아이, 소중한 내 아이, 잘 키워야 한다는 의욕과 의무감, 애정의 집합체인 내 아이가 학교에 다닌다. 내 욕하는 것은 참아도 내 부모 욕하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욕먹어도 되지만 내 아이가 혼나는 것은 못 참는다. 그런 아이를 매일 대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우리는 매우 관심 있게 바라본다. 일부는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동네에 친한 엄마들은 담임교사에게 불만이 있을 때 나에게 슬쩍 내비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 담임은 알림장을 좀 일찍 보내야 하는데 늦게 보내. 그러면 미리 준비를 못하잖아.” 맞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좀 일찍 보낼 수는 없는 거야?” 하며 나를 쳐다본다. “아, 그래, 불편하겠다. 일찍 보내면 좋지.”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학부모님에게서 갑자기 상담전화가 왔다거나, 교장이 ‘채 선생, 지금 잠깐 와 봐요’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선생님 입장을 옹호하기도 애매하다. “스승의 날 선물 뭐 드려야 하지? 땡글이엄마는 뭐가 좋아요? 많이 받아봤으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공무원으로서 교사는 작은 거라도 받으면 큰일 난다. 스승의 날 선물 안 받은 게 언젠데. 학교 선생님들은 금품을 절대 받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이것도 가끔 듣는 말이다. 공연장에 마개가 있는 물통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함께 간 한 분이 ‘선생님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다.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내 행동이나 생각을 교사라는 틀에 맞춰 규정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규칙을 살짝 비켜가는 행동을 할 때, 나를 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이러시면 안 된다’라고 하고, 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선생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층간소음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몇 년 전 층간소음으로 위층 아이 엄마와 다툼이 있었다. 말싸움 끝에 상대가 한 말이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래서 애들 어떻게 가르쳐요? 으이구,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예민해가지고!”였다. 내가 선생인 거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지? 교사라는 이유로 저런 말을 듣기도 한다. 선생이니까 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고 상대를 이해하며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야죠’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져야 하는 상황에서 ‘선생’이기 때문에 참고 인내하는 것, ‘허허’ 하고 넘어가기를 요구하는 것에는 호응해주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가끔 무단횡단을 한다. 주변에 사람이 없고, 특히 아이들이 없고, 양쪽 다 명백히 차가 오지 않을 때 그렇게 한다. 이럴 때 은근히 꼬숩다. 주변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다. 내가 선생이지만 남들이 ‘교사’나 ‘선생’에 대해 정한 규정에 갇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서다. 겨우 아무도 없을 때 하는 소심한 도발이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동네로 이사 와서 정말 좋다. 나의 익명성이 보장되니 정말 편하고 자유롭다. 아이 친구 엄마와 조금 친해져서 나의 직업을 알려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미 상대방이 눈치를 챈 데다가 나의 거주지가 현재 근무하는 학교와 조금 떨어져 있어 마음이 편했다. 가능하면 아는 사람도 만들지 않고 누군가와 친해져도 '나는 교사다'라고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교사라고 말하는 순간, '선생이라는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무단횡단을 할 때 무척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