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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꽃 Oct 09. 2024

진료실에서

병조퇴하고 정신과에 갔던 날 

  나: 선생님, 오늘은 진상 학부모 때문에 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교사인데요. 장문의 문자를 자주 보내고 거칠게 따지는 전화도 종종 하는 어머님이 계세요. 지금까지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제가 좀 힘드네요. 그동안에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자꾸 생각나고 밤에 자다가 깨요. 깨면 퍼뜩 그 어머님이 나에게 문자로 보낸 말들이 생각나면서 정신이 말똥말똥 해져요. 그러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뒷목이 뻣뻣해지고 목과 어깨 주변이 뜨거워져요. 목과 어깨 주변으로 징 하고 울리는 전기가 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며칠 전 학년 행사가 있어서 다 같이 학교 밖 행사장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었어요. Y가 늦게 와서 아이들이 복도에서 다들 줄을 선 채로 기다렸어요. Y는 평소에도 조금 늦게 오는 편입니다. 집이 먼 아이들도 비 오는 날씨에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물론 저도 일찍 오라고  미리 공지했고요. Y에게 '일찍 와야지' 한 마디 했더니 Y가 교사 말을 끊고 큰 소리를 쳤어요. "비가 와서 늦은 걸 어쩌라고요." 하면서요. 그때 교실에는 Y와 저만 있었습니다. 일단 복도로 나가자고 했죠. 친구들 기다리니까 빨리 나가자고요. 그때 복도에서 아이들 몇 명이 "Y는 왜 늦게 와?"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Y는 교실에서 복도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뭐! 왜 자꾸 뭐라고 하는데! 늦을 수도 있지!”라고 줄 서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저는 Y에게 친구들 기다리니까 소리 지르지 말고 나갈 준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Y가 또 제 말을 끊으면서 애들이 자기한테 뭐라고 한다고 큰 소리를 냈어요. 그런 Y를 보면서 아이들이 당황했습니다. 미리 와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아이들에게 소리를 크게 지르고 화를 내는 Y의 모습에 저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정을 섞지 않고 존댓말로 정당한 지도를 했습니다. 저도 당시에 다소 큰 소리로 그만하라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복도가 소란스럽고 Y의 목소리가 커서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그게 기분이 나빴나 봐요. 평소에도 자기가 기분이 나쁜 일이 있으면 집에 가서 얘기하고 Y의 어머니는 흥분해서 저에게 감정 섞인 장문의 문자를 보내십니다. 이번에는 교사포함 아이들 전체가 자신을 공격했다고 Y가 어머니에게 말을 한 모양이에요. 


  Y어머니는 저에게 '어디 그딴 소리를 하느냐, 막말하냐, 똑바로 하라, 내 아이가 당신 감정 쓰레기통이냐' 등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스크롤바를 몇 번이나 내려야 하는 긴 문자를 보냈습니다. 문자 끝에 이따 전화할 테니 어제 한 일 똑바로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Y의 어머님에게서 이런 식의 문자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이 많이 지나치다고 느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Y어머니와 통화했어요. 


 주변에 선생님들은 절대 감정대로 하지 말고 사실만 얘기하고 기계적인 대응만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대응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죠. 그런데 선을 넘는 표현에 대해 이번에는 한 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께 물으니 그것도 대부분 말리셨어요. 어떤 선생님은 그런 말을 해도 되지만 감정은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죠. 그건 맞습니다. 저도 차분하게 말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제가 감정 조절을 못하게 보였는지 다들 말리시더라고요. 


  그 어머님과 통화는 잘했습니다. 늦었다고 교사가 호통치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느꼈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 Y가 많이 속상했을 거다, 그것을 들은 어머님의 심정도 제가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나도 학부모로서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Y에게 소리를 그만 지르라는 주의를 주었지 화를 내지는 않았다, Y 목소리가 크지 않냐, 주의를 끌고 분명히 말하기 위해 평소보다 큰 소리로 얘기했을 뿐이다, 존댓말로 "친구들 기다리니까 그만하고 줄 서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Y는 왜 늦었냐는 말을 하는 아이들에게도 그만하라고 얘기했다고요. 일방적으로 Y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가 그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님이 물으시더라고요. 아이들이 Y가 늦냐는 말을 했냐고요. 아이들은 원래 그렇다, 남의 일을 궁금해한다고 했죠. 사실 아이들은 그렇거든요. 누가 늦게 오면 누구 오냐, 누가 결석하면 누구 결석하냐라고 항상 묻습니다. Y어머님 머릿속의 그림은 교사가 본인의 아이를 큰 소리로 혼내고 아이들은 그걸 보면서 Y는 왜 저러냐고 흉보는 거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어머님은 말투와 표현은 거칠지만 감정을 공감해 드리고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면 많이 누그러지세요. 제가 그걸 알고 있고 할 수 있어요. 어머님 마음도 풀어드렸고 제 할 말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화 끊고 난 다음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할 일 잘하고 퇴근했고요. 집에 와서도 속상했지만 크게 영향받지 않았어요.  

    

  의사: 많이 속상하셨겠네요. 내 아이를 봐주시는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을 한다니 이해가 안 되기도 하네요. 선생님이 화 많이 나셨을 것 같아요.      


  나: 제가 잠은 잘 자거든요. 남편이랑 싸워도 잠은 아주 잘 자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 연속 새벽에 깼어요. 그리고 한참 동안 괴로워서 뒤척였어요.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깨와 머리에 열이 올라와요.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울까? 화가 나는 것은 아닌데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괴로울까 생각해 보니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교사로서 대응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무력감이라고 할까. ‘어디서 그딴 행동을 합니까’라는 말을 듣고도 뭐라고 한 마디 못하고 주변에서는 ‘참아라, 참아라’하는 말을 들을 때의 무력감이요. 그분의 심한 말에 대해 내가 한 마디는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가 가장 크고요. 


  지금 Y와 그 어머니는 여행 중이거든요. 여행지에서 전화를 하신 거예요. 마지막에 제가 ‘즐거운 여행 하세요’라고 까지 말했어요. 이것도 좀 웃겨요. ‘나는 당신이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너 따위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괜찮은 척, 쿨 한 척하고 싶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은 거예요. 최소한 “어머님, 저는 어머님께서 장문의 문자나 전화하시는 거 괜찮습니다. 할 말은 하고 오해는 풀어야 하니까요. 심정적으로는 저도 어머님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씀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라고 얘기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쫄아서 그 말 한마디 못한 게 너무 바보 같아요. 집에서는 아이한테 막말하고 화내면서 밖에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제가 못난이 같아요. 


  주변 선생님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으라고 하는데 그들도 Y와 Y어머님에 대한 단편적인 말만 듣고 단편적인 말만 할 뿐이죠. Y와 그 어머님이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유명했거든요. 하지만 Y어머님과 상담을 하고 전화를 받고 장문의 문자를 받은 사람은 결국 저예요. 이 전체를 아는 건 저잖아요. 그러니 제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려서 말 한마디 못한 것에 후회와 자책이 들어요.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응하느냐 인데 제가 대응을 잘 못한 것 같아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제가 바보 같아서 화가 나요. 막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보요.    

 

  의사: 이 정도 말은 해도 됐을 것 같은데 못해서 속상하시다는 거죠?      


  나: 네, 선생님……. 그래서 저는 선생님한테, 전문가한테 그 말이 듣고 싶어요. 잘했다고, 그 말 안 한 것도 잘했다고요.     

 

  의사: 네. 잘 대응하셨어요. 하고 싶은 말을 못 했다 해도 충분히 잘하신 거예요. 다음에 또 그러면 한 번은 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나: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겨야 한다는 거잖아요. 아… 그건 너무 싫은데…….   

  

  의사: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걱정되시죠. 그건 너무 싫고요.     

  

  나: 네. 하지만 만약에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은 거고 아니면 불쾌한 일이 안 생겨서 좋은 거라고 생각할래요.  

    

  의사: 네 그러시면 되죠. 그리고 잘 대응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잘했다고 안 하세요?     


  나: 잘했다고는 하세요. 교감, 교장선생님께도 말씀드렸는데 말은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안 해서 후회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하셨어요. Y어머님에게 무슨 말을 하면 훨씬 더 큰 부메랑이 돼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고요.      


  의사: 다음에 혹시 그런 말을 하실 때는 그분 성향 상 조심스럽게 하시는 게 좋겠어요. 어머님의 문자를 보고 내가 놀라고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요.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그런 분은 공격받는다고 느끼거나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나: 서로 무시당할까 봐 걱정하네요. 저는 그분이 나를 무시하고, 그분은 남들이 자기 말을 무시한다고요.      

  의사: 네(끄덕끄덕).   

  

  나: 그분 전화 통화할 때는 말투가 거칠기는 하지만 문자만큼 감정적이지는 않아요.   

   

  의사: 아, 그러세요? 혹시 실제로 만난 적도 있으세요?     


 나: 네, 교실에 오셔서 상담한 적도 있어요. 쓰는 단어나 말투는 거칠지만 예의는 차리려고 하세요. 문자와 전화로는 따지면서 싸움을 거는 것 같은데 막상 얼굴 보고 얘기할 때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식이에요. 저도 덕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인사하기는 하죠. 

   

 의사: 실제 만나서나 전화상에서 욕하고 소리 지른다면 그 사람은 정말 상대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그분은 전화나, 실제 만남에서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는 거죠?   

  

  나: 네.      


  의사: 그러면 그분은 선은 넘지 않는 분이니까 흥분하면 흥분하는구나, 하고 보세요.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분 같아요. 그것은 그분의 병이에요. 그분의 병 때문에 선생님이 힘들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선생님이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분의 감정은 바꿀 수 없어요. 달라지지도 않고 선생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또 흥분하면 시간을 두고 지켜보세요. 답을 빨리 보내달라고 해도 조금 천천히 보내시고 감정을 풀 수 있는 시간을 주셔야 해요.      


  나: 네, 선생님. 그걸 알면서도 그 사람이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의사: 아니요. 그건 절대 그렇지 않아요(검지손가락까지 흔드시며 단호한 표정으로). 그건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자기 말을 잘 들어주고 이렇게 잘 대응해 주는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자신을 존중해 준다고 느낄 거예요. 그런 분은 다른 데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안 좋은 말을 들을 텐데 선생님은 잘 들어주시잖아요. 그런 사람을 절대 무시할 수 없어요.   

   

  나: 그럴까요?    

 

  의사: 네 이건 진짜 믿으셔도 돼요. 

     

  나: 전문가 말씀이니까 믿을게요.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의사: 약은 증상이 나타날 때 먹을 수 있는 안정제와 항우울제 처방해 드릴게요. 안정제는 뒷목 뻣뻣해지고 가슴 두근거림 나타날 때 드시면 바로 효과가 나올 거예요.     

 

  나: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나는 자나팜과 파마설트랄린을 처방받고 진료확인서를 받아 병원을 나왔다. 역시 병원에 가길 잘했다. 혼자서 끙끙 앓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역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좋다.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 솔직하게 털어놓고 고통을 덜어주는 약을 처방받으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또한 상대가 나를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 당신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나에게 필요한 일이다. 당신 따위는 감히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강한 척을 했지만 내 힘든 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스스로 보듬어 주고도 싶었다. 처방받은 약 반절은 집에, 반절은 출퇴근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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