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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꽃 Nov 06. 2024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남은 두 달여, 올 한 해를 살아낼 힘을 짜내기 위해 읽은 책. 


  어느 해나 만만한 때가 없다. 올해도 마찬가지. 복직을 했고 말로만 듣던 악성민원을 수시로 제기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만났다. 사나흘에 한 번씩 반복되는 첫째 아이와의 갈등은 징그러울 정도로 지겹지만 그 지겨운 짓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다. 막내는 사고강박이 다시 나타났다. 병원에 가니 사고강박보다는 우울증이 더 심하다고 했다. 고작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인데. 나는 양쪽 난소에 큰 혹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암은 아니지만 작아지지도 않기에 언젠가 약물치료나 수술이 필요할지 모른다. 아빠는 치매가 더 심해지셨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내가 되게 불행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또 이런 일들이 내 일상을 짓누르지는 않는다. 잠도 잘 자고 일터에 나가서 돈도 벌고 아이들이랑 웃고 얘기하고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간다.  남편하고 가끔 스타벅스에 가서 대화도 나눈다. 다만 내 마음속에서 걱정과 불안, 억울함, 화, 우울함 같은 것들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내 몸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런 감정들이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아이가 왔을까? 내 아이 세명 중에 두 명은 불안, 강박, 우울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뭘 잘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냥 예뻐해주기만 한 것 같은데. 나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술, 담배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고 채식위주 식사를 하는데 왜 난소에 혹이 생겼을까? 우리 아빠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매일 운동을 빼먹지 않으셨다. 그런데 왜 치매에 걸렸을까? 그로 인해 엄마가 간병지옥에 살고 계신다. 나도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이미 진행 중인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검소하게 살고 꼭 필요한 소비만 하는데 무용하는 첫째에게 일방적으로 돈이 흘러들어 간다. 아이들 교육비로 다 쓰는데... 첫째 아이는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라고 하면서 알아서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일하고 돈 벌면 뭐 하나? 내가 왜 돈 퍼주면서 무시당해야 하지?


  우울한 일만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하다. 그럴 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라고 했던가? '사람이 위만 보면 어떡하냐 아래도 봐야지'라고 하던데 나는 그 말이 별로 마땅치 않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겠지만 굳이 아래를 보고 싶지 않다. 사람이 위를 보고 더 나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래를 보면서 '나는 쟤보다 낫다'하면서 우월감이나 동정심을 가지라는 건가?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7년 전에 처음 읽었다. 그 후로 꼭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매우 인상 깊어서 가끔 떠올리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어도 그 사람은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랑은 계속된다, 행복이나 성공을 잊고 있을 때 행복과 성공이 찾아온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는 남아 있다, 같은 구절이다.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내가 건강검진 결과가 안 좋아봤자 암투병 하는 사람만 할까, 내가 자식 때문에 아무리 속이 터져도 세월호나 이태원에서 자식을 잃은 사람만 할까, 직장이나 집에서 내가 누군가로 인해 아무리 괴로워도 치매남편을 돌보는 우리 엄마만 할까. 아니. 절대 아닐 거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단의 고통을 겪고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괴로운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먹고 싶을 것을 먹고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있고 안아줄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 


  저자인 빅터프랭클이 책 전반에서 강조하는 것은 삶의 의미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하고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살아남냐 그렇지 못하냐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초강력 정신승리 방법의 한 형태인 것 같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나?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헤쳐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는. 나는 여기서 주저앉아 울지 않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열심히 살아봤자 속 썩이는 자식,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수입과 지출, 시간과 함께 남는 것은 출렁이는 뱃살과 늙어가는 몸뿐인데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삶의 의미라는 것이 있나?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체가능하고 특별히 꼭 필요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의미'같은 것은 없고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지 적어서 문제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인 멸종된다는 말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엄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 셋(중학생도 어린아이라면),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가 셋 있으므로 나는 살아야 한다. 나 혼자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아직은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나의 삶의 의미는 일단 '양육'에서 찾기로 했다. 얼마 전 내 생일 때 둘째 아이에게서 '엄마는 나에게 행운'이라는 고백을 받았다. 셋째에게서는 '키워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고. 첫째와는 대판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살아갈 의미가 있다. 그렇게 마음을 부여잡는다. 


  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지만 솔직히 문제라면 문제이고 아니라면 아닌 정도이지 않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을 시기적절하게 읽고 시기적절한 힘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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