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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꽃 Nov 18. 202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여기저기서 좋다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과연 재밌는 책이었다. 메시지도 확실하고. 이 책은 글쓰기 수업 다니던 동네 책방 잘 보이는 자리에 항상 진열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베스트셀러나 너도나도 좋다고 하는 책은 일부러 읽지 않았었다. 왜 그런가는 나도 분명하게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남들 다 읽는 거 나는 읽지 않겠다, 남들 다 하는 거 나는 하지 않겠다, 뭐 그런 쓸데없는 허세를 부린 것이다. 요즘은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금방 집어 들어 읽어본다. 유명한 작가가 냈다고 하면 뭔가 궁금해서 얼른 찾아본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단 과학을 소재로 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과학이 어렵고 이해가 안 간다. 궁금하긴 하지만 친절하고 자세하고 아주 쉽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내 미천한 과학지식과 흥미로는 금방 딴생각이 든다. 이거 몇 쪽까지 있나 하고 떠들러 보거나 전자책 같으면 여기저기 눌러보다가, 대충 읽고 과자 좀 먹어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다음 이유로는 작가가 너무 잘났다. 어리고 예쁘시고 똑똑하신 분이 글까지 잘 쓴다고! 질투에 사로잡힌 나는 그런 사람의 책을 읽어주고 싶지 않았다. 나라도 안 읽어줘야지 좀 끌어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림도 없는 욕심을 부렸다. 나이 들면서 좋은 것은 거의 없는데 그나마 좋은 것 중에 하나는 기력이 달려서 그런지 질투도 전만큼 열정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횟수나 강도가 많이 약해졌다.  <겨울서점>에서 장기하 님이 이 책이 과학을 소재로 사람 이야기를 한다고 했던가?(확실하지 않음) 그 말을 듣고 이제는 좀 읽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학을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이 책에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들이 엮여 있다. 책의 제목은 그중 한 소설의 제목이다. 제목도 어쩌면 이렇게 시적으로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다. 많은 리뷰에서 이 책은 여성, 장애인,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렇다. 이 책에서는 첨단과학 기술을 소재로 우리가 겪고 있는 차별, 억압, 소외, 고통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과학기술이 일상이 되는 먼 미래, 또는 아주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떨까? 그때는 우리가 사는 곳이 유토피아가 될까? 많은 문제를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텐데 그러면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 편하게 살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 책 속에서도 그렇지 않다. 지금은 지금대로, 그때는 그때대로 차별, 억압, 소외, 고통은 계속된다. AI로 인해 도태되는 사람이 90% 이상이고 인간사회는 극심한 피라미드 구조가 될 것이라고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버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이들 세대는 AI와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확연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차별과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옆으로 새는 말 같지만, 두렵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뿐 아니라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7개의 단편소설 모두 재미있었고 신선했다. 그중 가장 여운이 남는 것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세 편이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왜 유토피아라고 만들어 놓은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야 하는 '시초지'에 남았을까? 그곳에는 유토피아에는 없는 고통과 함께 사랑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는 고난도 그것을 통한 성장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 같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유토피아가 있다면 떠나고 싶지만 그런 곳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받아들이고 산다.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관내분실>은 죽은 엄마를 찾아가는 딸의 여정이다. 엄마는 첫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을 시작으로 평생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 외롭게 죽었다. 주인공 지민은 임신 8주를 맞으며 엄마를 떠올린다. 지민과 엄마에게 모녀의 정 같은 것은 없다. 지민에게 엄마라는 사람은 한 때는 고통을 주었고 언젠가부터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지민이 엄마가 죽은 후에 엄마를 찾아간다. 하지만 마인드라는 형태로 죽은 후에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관되어 있어야 하는 엄마를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엄마를 만난 지민은 말한다. "엄마를 이해해요" 


  

  세상의 모든 딸들이여. 특히 엄마 말 안 듣는 딸들이여. 제발 너랑 똑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그때서야 겨우 엄마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우주영웅에 대하여>에서는 공감하는 것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 공감하는 것은 사람들의 편견과 약한 사람을 향한 비난과 혐오다. 재경은 중년이고 비혼모이고 동양인 여성이다. 그런 재경이 최종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을 때 사람들은 화살을 쏘아댄다. 중년, 비혼모, 여성, 동양인이 우주터널을 통과하는 최초의 비행사로 적당한가? 백인남성 정도는 되어야 적당하지 않겠는가! 언제, 어디서든 사회적 약자에게 우리는 아주 쉽게 떼로 달려들어 평가와 비난을 쏟아낸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잘생기고 젊은 남자 과학자가 쓴 소설이었다면 질투하지 않고 읽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조금 덜 질투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비행 전날 재경이 바다에 뛰어든 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도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재경의 마지막 선택에는 억압을 벗고 자유를 찾아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공감하지 못하겠다. 


  오늘 동아일보를 보니 김초엽작가가 지면 한 부분에 글을 썼다. 순간 질투가 솟아났다. 하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이렇게 잘나고 멋진 여성이 소외된 여성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은 주목하지 않고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관점에 털썩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런 분이 많아야 할 텐데... 우리는 편견과 소외, 차별에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김초엽작가 같은 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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