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를 봤는데 더파이팅이 생각나네.
고등학교 1학년, 추석 연휴였다. 햇빛이 쨍쨍했다. 침대에 누워 '오늘 뭐 하지?'라고 물었다. 친구가 말했다. ‘더파이팅 보자!’ 사이드미러 한쪽이 깨진 싸구려 중고 스쿠터의 시동을 걸었다. 책방에서 복싱 만화 ‘더파이팅’을 빌렸다. 책을 종이 쇼핑백에 한가득 담았다. 만화책으로 꽉 찬 쇼핑백을 다리 사이에 끼고 도로를 달렸다. 뭐가 그리 좋았던지 쉴 새 없이 깔깔거렸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친구는 바닥에 엎드렸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해가 질 때까지 만화책을 봤다. 만화 속 주인공은 상대방 펀치에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먹을 뻗었다. 그런 장면을 보니 가슴이 쿵쾅 뛰었다. ‘그래! 이런 열정이야! 나도 이렇게 살아야 해!’ 친구와 같이 웃던 추억, 주인공의 열정에 감동한 나의 마음. 내게 만화란 그런 이미지였다.
얼마 전 아내와 극장에서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봤다. 유명한 만화지만 둘 다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강백호’ ‘서태웅’ 유명한 캐릭터 정도만 알았다. 이번 극장판은 평점이 높았다. 리뷰는 칭찬 일색이었다. 갑자기 궁금했다. ‘얼마나 재미있길래 이러지?’ 추억에 젖은 사람들만 재미있으려나 싶었다. 기대 반 호기심 반이었다.
영화가 끝났다. 스텝 롤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울컥함이 멈추지 않았다.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와 긴박감 넘치는 연출 때문일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장 큰 건 그 시절의 만화를, 시간이 흘러 다시 본다는 묘한 감정이었다. 슬램덩크를 정주행 했던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감동이었을까.
구석으로 밀어뒀던 낭만이나 추억도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었다. 알고 있지만 잊었다. 이번에 영화를 보며 다시 깨달았다. 추억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사는 데 적지 않은 동력이 됨을 느꼈다. 삶이 단조로운 평행선을 그릴 때, 가슴 뛰던 시절을 떠올렸을 뿐이다. 썩 재미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때 ‘더파이팅’ 만화를 같이 봤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이제 스쿠터가 아닌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바닷가를 걸으며 같이 만화책을 봤을 때 기억이 나냐 물었다. 당연히 기억한다고 좋았었다고 친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쉴 새 없이 깔깔 웃었다. 오래간만에 광대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