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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엔진 Apr 05. 2021

가장 현실적인 선택

완성되는 것은 없다. 매일 변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뿐

 20년 12월 마지막 주 


 내 인생의 전체를 회고하는 시간이 왔을 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준 몇 가지 사건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퇴사결심에 대한 글을 공개적으로 오픈한 것이다. 물론 어떤 선택의 결과가 완전히 꽃놀이패가 될 수는 없다. 일부의 관계에서는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그동안 특정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만들어왔던 어떤 정성적인 에너지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결심을 밝힌지 약 100일의 시간을 지나서 지금 느끼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충만한 느낌과 깨달은 지점, 오늘의 시점에서 내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을 정리해놓고자 한다. 




1. 손을 내밀어야 잡아줄 사람도 있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브런치를 통해서 퇴사결심을 밝혔던 것은 나 스스로의 결심을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지만 내가 그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오직 인생의 우선 순위라고 생각한 "가족"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고,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무모해보이지만 개개인의 삶의 깊숙하게 들어가서 판단하면 이것이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족에게도 최선을 못하고, 그것이 결국 회사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마지막으로 그런 나 자신까지 무너지는 예견된 미래를 선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결심은 자기 혼자 몰래(?)하면 금새 자기 합리화를 통해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오픈하면서 비가역성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고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의도도 없었다. 가족관계의 리-빌드업이 끝나는 시점에는 내가 현대자동차를 선택했던 이유보다 조금 더 거대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 정도만 정리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눈여겨보고 있던 스타트업의 대표님께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내서 메일 주소를 부탁드렸고, 개인적인 상황을 설명드리고 약 1~2년 이후에 합류할 수 있는 포지션이 있을 경우 함께 하고 싶다는 콜드콜을 먼저 드린 것이 내가 그 당시 시점에 했던 전부였다. 

 

내가 그동안 공유한 포스팅 중에 가장 많은 반응과 댓글이 달린...;;


 재밌는 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놓여진 상황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많은 분들이 손을 내밀어주기 시작했다. 애정어린 조언과 응원도 많이 받았고, 사내/외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안을 받기도 했던 것은 결국 이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빌어 정말 손 내밀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계속 보답하면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슴 속에 꿈과 열정은 있지만, 그것을 가로막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구마 100개 먹은 답답한 상황 속에 놓여서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다. 그리고 혼자서는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지다가 스스로 무너질 위험 속에 노출되는 것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의 생활을 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그럴 때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때로는 용기있게 도움을 구해보면 어떨까? 그것이 우리를 어떤 길로 이끌어줄지는 지금 그 선택을 하는 시점의 당신도, 그 이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 용기도 내지않고 그 자리에서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용기를 내는 것이 최소한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내가 보증할 수 있다.  




2.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사실 직장인들이 점점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의 내일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참으로 심플하게 정리된 우리의 속담은 어릴 때부터 사회화라는 미명하에 머릿 속 깊게 뿌리박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런 걱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간다.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가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라는 걱정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가 그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
 내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솔직한 의견 제시가 갑자기 팀의 수명사항이 되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팀원들한테 눈칫밥을 먹게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
 그런 것들이 다면 평가에서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걱정
 괜히 일을 만들어서 해봐야 실제 성과 평가는 조직의 논리에 의해서 이뤄지는 경험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무력감에 대한 걱정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실행하기 보다는 점점 무뎌지며 내가 가장 되기 싫어했던 그 모습이 되어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하지만 막상 비겁한 선택들을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21년 3월 31일이라는 일시로 특정된 마지막 시점이 부여되었고 그러다보니 더 이상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여유(?)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마무리해나가고 있으며 이런 마음가짐으로 행동하는 매일의 선택의 충실함의 감정을 만끽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다른 옵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회사에서 끝까지 간다는 선택지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비겁함에 무뎌졌다면,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오늘의 출근길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 마지막의 순간에 구조적으로 못한 것이 아닌 나의 나태함이나 비겁함 때문에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눈 앞의 작은 성공보다 더 높은 성취를 위한 올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이제서야 조금은 더욱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다. 




3. 나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말자.


 기업에 성과없이 존버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마지막이 정해졌다고 나태하게 사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한다. 그 사람이 성과없이 존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잘못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정확하게 성과를 측정하여 공정하게 평가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기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말은 한다는 것이 가져오는 괴리감이 엄청나긴 하지만...)


 기업이 다양한 명분을 가지고 표방하는 가치와 실제 행위를 다르게 하는 위선적인 지점이 있는 것처럼 그 조직에 속해있는 개인 역시 그런 위선적인 선택을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이 자체를 문제 삼아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려는 조직에는 개인적으로 밝은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변화하려고 하는 정성적 속성이 있다. 그 선택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구조적으로는 반드시 더 나은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 그 굴레 속의 개인은 뭐 이렇게 밖에 안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체적인 구조는 그렇다. 선택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라는 것 뿐.


 그런데 개인은 그렇지가 않다.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편안함에 취해서, 연차에 취해서, 직급/직책에 취해서, 권력에 취해서 조직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가진 선택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염치없음" 그 자체일 뿐이다. 그 선택은 결코 올바르다고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


 염치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인하여 나 역시 염치없는 인간이 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은 제일 편한 길일 수도 있다. 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인간 심리의 자연스러운 방어 기제를 통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들,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내가 속한 기업, 국가의 시스템이라고 맘편히 생각해버리는 것이 당연히 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염치없는 삶, 비겁한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내 주변의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지난 9년간의 삶을 통해서 타인의 인정과 관계없이 나 스스로에게 증명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와이프와 아이들과 얘기할때 결코 그들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어떤 힘든 순간이 와도 비겁해지지말자.  




4. 항상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자. 하지만 허용 범위라는 것이 있다. 


 이런 선택의 원인이 되었던 가장 큰 이유를 생각해보면 타인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하지않는 내 모습 때문이었다. 항상 나는 가족의 경제적 생활을 책임지는 메인 역할로서 내가 더 먼저 이해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충분하지 않은 대화와 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선택들은 오랜 시간의 오해를 만들어왔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음을 얘기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음을 설득하려고 했고 심정적으로는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마음 속에 쌓여가던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함은 겉으로는 서로를 배려하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극단의 양끝을 양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누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부모님의 불화로 인해 진행된 이혼소송과 재산분할 문제를 처리하면서 중심을 똑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음이라고 착각했던 것 역시 내가 더 우선적으로 이해 받기를 원하는 핑계였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서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조금 더 많은 대화를 서로에게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결국 우리는, 특히 나는 "나 자신의 입장"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이런 상황이니까 니가 이해해야한다는 것은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새로운 갈등을 항상 내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나와 너의 입장이 아닌 "우리"라는 관점에서부터 출발해서 문제를 정의하고 풀어내기로 말이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한다"


 사실 회사 생활은 최대한 이런 방식으로 해왔다. 그렇기에 와이프 입장에서는 더욱 서운했을 것이다. 가끔씩 다투다보면 얘기하던 외부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잘하면서 왜 나한테는 못하냐는 그 얘기를 그저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말하는 불만이라고만 치부하다가 새삼 아프게 다가온 것도 지난 100일의 위기를 통해서 느꼈던 수많은 복합적인 상황들에서 깨달은 가장 큰 성취였다.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자.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회사생활이라도 허용범위라는 게 있다. 지금까지도 아래 3가지 기준은 인생에서 손절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2번에서 얘기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어느 정도는 허용하고 살아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확한다. 아래의 3가지 유형은 내가 어디에 가서라도 내 인생의 아주 작은 순간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이 늘어날까 좋은 사람인척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만을 위한 반대,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 특히 All or Nothing / 흑과 백 / 좌와 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사고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핑계만을 위한 핑계를 대는 사람.
 공동체의 더 나은 방향을 위한 말하기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포장된 뒷담화와 거짓을 옮기고 다니는 사람.
 광팔이 (이건 뭐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내 가족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희생했다는 것이 지난 9년을 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순간들이라는 것. 어쩔 수 없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하자. 모든 것은 그저 선택일 뿐이다. 




5.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이건 이제 더 이상 말해 무엇하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와 우리 가족이다. 더 이상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상충되는 지점이 발생하지 않도록 오히려 더욱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시간을 밀도있게 사용하고, 올바르게 커뮤니케이션 해야한다는 것이 가장 우선되야하는 전제조건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나오는 아래와 같은 유형의 일화가 있다.

 퇴근 후 회사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 하필 그 시간에 아들과의 써커스 약속이 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 일이기에 엄청나게 들떠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본다. 

 "제가 들어가면 지금 즉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사실 그렇지는 않은 상황이었던 것. 일단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조직에서 사람만 다 소집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얘기한다.

 "지금 제가 들어가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나서 합류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오늘 해결하지 않아도 되며 내일도 해결할 수 있지만 오늘 이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고 써커스를 즐기는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이니까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앞으로 추구할 인생은 이런 모습이다. 자기 주도적인 삶. 그 삶 속에서 상충되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 우선인지 명확하게 혼선을 겪지 않는 삶. 만약 반드시 내가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 경우라면 내 가족에게 내 상황만을 일방적으로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양해를 구하고 가족들의 입장에서 소통하고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을 때도 서로 간에 서운함보다는 이해와 존중이 넘치는 가족으로 만들어가는 것.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을 뿐이다. 




6. 조직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아 존중 중심주의를 선택하자


 조직 내부 평가나 이직 시장에서 몸값 떨어지는 소리를 또 이렇게 당당하게 써놓는 것을 보면 나는 역시 또라이 기질이 다분하다. 하지만 저 문장이 어떤 맥락의 의미를 갖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조직이라면 나 역시 그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정리된 생각을 몇 가지 정리해본다. 


 많은 기업은 "충성심과 헌신"을 하는 인재를 원한다. 하지만 그걸 원하는만큼 "공정한 평가와 보상"을 등가적인 수준으로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사실 고민한다고 해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한 현실이다. 공정이라는 가치는 근본적으로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부 대기업의 문제인 것처럼 프레임 씌우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타트업 씬에서 훨씬 위선적인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대기업은 최소한 기본 급여와 복리후생이라도 높지만, 지분과 스톡옵션 하나 없는 경우인데 급여까지 후지다면 과연 조직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고 하는 창업자 및 C레벨의 그 말은 공허함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구조적으로 생산수단을 스스로 소유하지 못한 미생들에게는 어차피 나눠먹을 파이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이 급여가 됐던, 성과금이 됐던, 진급 T/O가 됐던지 반드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의 정리가 되고 나니 굳이 지금까지 9년동안 묵묵하게 주어진 일만 한 것이 다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는 HR담당부서 및 평가자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그들도 참 많은 고민이 있을텐데 나까지 고민을 더해주지는 말자는 순진했던 사고를 이제는 내려놓으려고 한다. 


 타인의 입장은 고려하되, 그렇다고 나 스스로를 온전히 내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정당한 요구는 정당하게, 공식적으로, 기록과 함께 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지난 100일 간 정리된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7. 근로기준법을 존중하되, 그늘에 숨지는 말자.


 오늘까지의 기준에서의 마지막 깨달음이다. 앞으로 점점 더 고용의 유연화는 시대적 흐름처럼 흘러갈 것이고, 당장 미국처럼 "You're Fired!!" 처럼 외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히 고용은 불안정해지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사실 HR 스터디를 하다보면 채용 - 온보딩 -  교육 - 평가 - 급여/보상 - 퇴직의 프로세스부터 노무/조직문화까지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은 항상 2가지였다. 저성과 기반 해고 불가능한 노동의 경직성과 오너의 결단에 모든 것이 좌지우지 되는 기업 구조에서 HR은 그저 HR을 위한 HR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힘듬만을 얘기할 뿐 왜 그런 수준까지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 자신의 성과를 내부 직원들에게 공정하게 나누고, 공동체를 위해 환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답답해보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이 사회의 마지노선이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전판이 생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너무나 가볍게 말하는 것을 접할 때 마음이 참 아프기도 하지만, 그럴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가볍게 말하려는 자들만을 탓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안전판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열심히 심리적 안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으며 그것이 생산성에 결코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로자가 많아져야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고용을 유연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대를 이야기할 때 명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수준에서 적극적으로 나 스스로를 위한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서 더 나은 개인의 발전과 좋은 사람들/좋은 팀들과의 네트워킹을 만들고, 그것이 또한 앞으로 내가 속할 조직의 더 좋은 성과로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입증하는데 노력할 것임을 다짐해본다. 

 



 완성되는 인생이란 없다. 매일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 그렇게 오늘도 나는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지난 퇴사 결심을 밝힌 이후 약 100여일 동안 겪은 참 웃지 못할 해프닝 수많은 해프닝 속에서 정리한 7가지 생각이다.


P.S - 어디로 가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데 그 얘기는 완전히 확정된 이후 다음에 한번 별도의 스토리로 풀어보겠습니다. 


P.S 2 - 언젠가는 공개될 나머지 퇴사결심 6일차 이후의 100여일치의 매일 간의 기록은... 적절한 시기에 하나씩 오픈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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