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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엔진 Jul 23. 2016

역지사지를 잃어버린 사회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회는 정의로운가?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나라였다. 

 최소한 83년생으로 태어나서 살아온 세대에게는. 

 

 아날로그부터 디지털로의 전환, 바닥에서부터 과학의 가속화된 진보로 인한 압축 성장의 수혜를 겪으며 균형자적인 시대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의 역사에서는 폐허부터 다시 리셋되어 시작되지 않는 이상 다시 오지 않을 축복이기 때문이다.  


 반공 포스터 공모전을 하는 이념주의가 지배하는 아직은 덜 성숙한 사회도 스스로가 미성숙한 어린 시절에 겪어봤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듯 하더니 1997년 IMF 를 맞아서 무너지는 모습도 겪어봤다. 집에 고이 모셔둔 패물들을 모아 금모으기 운동으로 나라를 생각하던 마음은 이제는 어디갔는지 모를 정도로 뜨거웠던 그 시절도 겪었고,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20살 청년으로서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심각한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멍들기 시작하더니, 나도 모르는 순간 정의로운 정치는 실종됐다. 좌와 우, 소수 역시 모두 관계없이 이념은 실종되고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부정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도래한다. 구조적인 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는 사라지고 우리의 양손에는 부정의가 판치는 "헬조선" 만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누군가, 또는 어느 집단만의 책임일까?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최근 벌어지는 사건들과 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보면 시작은 누군가, 또는 어느 집단의 책임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 사회를 구성해야 하는 핵심 개념을 잃어버고 모두 이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가장 핵심 개념은 바로 "역지사지".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자. 


 상반기를 돌아봤을 때 폭발적으로 대한민국을 강타한 사건은 박유천의 강간과 홍상수/김민희의 불륜 스캔들이다. 


 순수함과 깨끗한 이미지로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한 아이돌 출신 스타가 있다. 무엇도 부족해보일 것 없던 그가 성을 사고 파는 술집에서 그것도 화장실에서 업소 여성을 강간했다는 충격적인 상황. 그 상황이 전개되자 자신도 피해자라고 속출하는 2, 3의 피해자들. 유죄가 확보되기 전까지 보호되어야 하는 피의자의 법적 권리는 온데간데 없이 모두가 사실 확인 없이 그저 "추정" 만으로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렸다. 

  

 홍상수/김민희 커플, 간통죄도 폐지한 대한민국에서 불륜스캔들로 뜨거움을 과시한 그들은 사랑에 빠지면 딸까지도 버린 아버지와 위아래도 없이 안주인을 쫓아내면서 오히려 당당한 한 철없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를 외치고 있다. 홍상수 부부의 오랜 세월의 가정사는 그저 그들만의 개인 사정일 뿐 오랜 세월의 그들 사이의 관계는 티끌 이하도 이해 못하는 대중은 그저 "추정" 만으로 부정의와 연민을 구분 짓고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사건 사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공무원의 계급론과 민중 개,돼지 발언은 이 사회의 지도계층이라 불리는 자들의 의식 수준을 여실히 드러냈고, 이번 정권이 끝나면 자신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특정 세력은 끝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프로야구계에서 그나마 흙수저부터 시작해 성공했다고 평가 받은 한 선수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통하여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장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포츠판에서 한순간의 일확천금을 위해 승부조작을 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한번에 2,000만원을 벌 수 있는 상황. 적은 수준이 아닌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닌 1군 프로선수들이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눈 앞의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 모두를 배신하는 부정의를 택했고 많은 팬들은 실망하고 그들을 탓한다. 


 오늘 아침 충격적인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은 이런 모든 사건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사건 사고를 보면서 분노하는 대한민국을 가만히 살펴보면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왜 우리는 남이 하는 성매매에는 일말의 용서가 없으면서 서울 주요 유흥가에 불야성처럼 번쩍이는 성을 사고 파는 업소들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고 살아가는 것인가? 왜 우리는 불륜이 판을 치고 이를 통해 성업하는 서울 근교의 수많은 모텔들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고 살아가는 것인가? 왜 우리는 모두를 위하지 않는 고위 공무원을 욕하면서 나 스스로에게는, 그리고 내 자식에게는 "나만 아니면 돼!" 를 가르치면서 특정 집단엔 소속되길 원하는 것인가? 왜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냐고 손가락질 하면서 나는 과연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룰 속에서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신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부조리한 시스템에 항거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진보를 위한 분노는 당연한 방향성이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저 내가 힘든 삶에 대하여 분노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 분노를 잘게 쪼개어 봤을 때 그것이 정의로부터의 출발이 아닌 "비겁하고 치졸함" 에서 발로한 것이라면 나는 과연 분노할 자격은 있는 사람인 것인가?

 



 "당신이 승부조작을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당신의 구위가 흔들린다고 걱정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어느 네티즌이 이번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을 보면서 남긴 댓글이고, 어떤 스포츠 기자와 많은 팬들에게는 큰 공감을 일으킨 댓글이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그런 사건 사고의 주인공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부정의하다" 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 그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매도하고 부정할 수 있는 권리는 있는 것일까? 


 만약에 내가 그 입장이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일부 성공한 인생을 살아기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월급쟁이들은 일확천금을 꿈꾼다. 그래서 매주 복권도 사고 주식에도 투자한다. 월급 많이 주는 곳이 있으면 이직하고 싶다 또는 자본만 있으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주변 동료에게 얘기하고 막상 회사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대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동료들과 힘든 삶을 한탄하며 소주한잔을 하기도 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도 모른다는 핑계로 잘뭇된 선택을 하기도 하며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어느 순간 이 모든 잘못은 내 잘못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인정하긴 싫을지라도) 현재의 모습이다. 


 이것이 도대체 짧은 선수생활 동안 쉽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는 몇몇 선수들과 자신이 가진 능력 범위의 한계에서 사회가 법적으로 허용한 선을 넘어서 유흥을 즐기는 연예인과 사랑이라고 외치며 불륜을 자행하는 일부 유명인들의 행동과 관념적인 측면에서 다른 면은 무엇일까?


 그저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분노로써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의를 평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모든 사실들을 알고 나면 상황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는 때로는 희석되기도 한다.


 하나의 가상 스토리를 상정해본다. 


 "억" 이라는 단위는 우습고 "조" 라는 돈을 벌어들여서 더 이상 돈에 대한 미련이 없는 회장이 있다. 그런데 젋음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바쁘게 달려온 인생 때문에 정상적인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가정을 가져본 적도 없다. 일반적인 사랑에 도전해보지만 그저 자신의 돈만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들만 다가오고 육체적인 조건의 제한도 많다. 그렇다고 자신의 수준을 낮추고 싶지는 않다보니 막상 이뤄지는 성과는 없다. 


 "그래. 어렵게 할 거 뭐있나.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내가 맘에 들어하는 조건의 젊은 아가씨들을 찾아서 즐겨보자. 그게 잘못일수도 있지만 상대방에게도 충분히 보상한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그 회장님은 수백만원의 돈을 주고 여러 여자들을 품에 안는다. 


 대부분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노려 "회장님의 놀이"에 참여하지만 한 여성은 상황이 그렇지 않다. 내가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호흡기를 떼고 하늘나라로 떠나야 하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준비하고 낳은 아이가 아니였고 미혼모인 그녀였기에 병원비를 감당할 능력은 없다. 당장 내일까지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내 아기는 이 세상을 떠나야한다. 다행히 젋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이런 돈벌이가 있다는 사실을 운이 좋게 알게되고 그 돈을 통하여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건강을 찾게 된다. 


 (스토리는 가상스토리니까 조악하지만 이해해주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상황에서 회장님은 스스로 이룬 인생의 열매를 즐긴 사람인가? 그저 부도덕한 성매매인가?

 미혼모는 쉽게 돈을 벌려는 부도덕한 성매매 제공자인가?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한 처절한 모성애인가?

 미숙아는 어머니가 부도덕하게 돈을 벌어오지 않았다면 그저 자신의 운명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정의인가?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지만,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살아져간다. 만약에 이런 삶이 너무 많은 사회라면 그것은 해당 공동체가 이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부조리하게 설계한 것을 더욱 면밀히 살피고 개선해야 할 뿐 허울 좋은 정의만 외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부조리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의 멍에는 가장 깨끗하고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평가하면서 타인의 삶에 멍에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엄격한 잣대를 통한 분노로 인해 오히려 나 스스로의 삶까지 불필요하게 소모하거나 나락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부정의에 관대해지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후관계 없이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 쉽게 평가하고 분노하고 매도하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된다. 


 공감하기 어렵고 결론짓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최근 이러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무지한 대중에 대한 언론 전략과 공안 정국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비판하는 분들을 보며 이런 말씀을 드리며 정리하고 싶다. 


 "그러한 전략을 아직도 누군가 사용한다면 그것이 효과성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며 이런 사건들을 통해 그것들이 회자되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며 중요한 사건들이 묻힌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들을 전하는 언론인의 양심이 실종된 것이요. 중요한 사건과 우선 순위보다 그저 지나가면 기억도 못할 남의 인생에 대하여 쉽게 평가하고 손가락질 하는 우리 스스로의 수준 때문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을 근본부터 무너트리고 있는 것은 실종된 '역지사지의 태도' 가 아닐까.


 "과연 내가 저 사람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내가 저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내가 저런 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00%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었을까?" 라는 자기 성찰을 통해 이 질문에 모두가 "나는 100%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라고 답할 수 있고, 어떤 사건 사고가 벌어졌을 때 그들조차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깨끗하고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도 아름다운, 사랑하는 우리나라가 조금 더 살아볼만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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