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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Dec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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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마지막 날 아침, 창문 밖은 아직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어제 일찍 잠에 든 탓인지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가 머무는 시간이 적은 걸 보니 아직 출근 시간도 되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하는데 차가운 공기를 뚫고 쇠 가르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렇게 일찍부터 공사를 하나, 생각하던 때에 다른 건물에서 드릴로 벽을 뚫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침대에 누워 정적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옥상으로 나가 보니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이 공사 중이었다. 심지어 도로엔 가로수 정비용 차량이 비상음을 내며 서 있었고 사람들이 내리더니 이내 전기톱으로 가로수를 뎅강뎅강 자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물으니 가로수 모종을 교체하는 시기란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까지 산문집 인터뷰에 대한 답변을 완성해서 보내야 하고 쓰고 있던 소설의 스토리 라인을 정리하기로 했다. 11월의 마지막 날까지 내가 하기로 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날보다 소음이 심했다. 동서남북으로 진동하는 소음에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바이러스로 인해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금지된 상태다. 자주 가는 바는 열지도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호텔을 예약하고 샤워를 했다. 대충 하룻밤의 짐을 챙긴 뒤 친구에게 연락해 반려견을 좀 돌봐달라 부탁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온갖 공사 차량이 1차선 도로 양 옆에 세워져 공사 진행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이동해야 했다. 지옥 같은 거리를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호텔은 70km 되는 거리로 1시간 10분 정도 걸렸다.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와 한산한 거리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커피를 한 잔 샀다. 운전석에 앉아 카를라 브루니의 음악을 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를라 브루니의 목소리에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다급하지도 않고 욕심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사람처럼 노래했고 그녀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도착한 숙소는 바다를 바라보는 10층으로 배정받았다. 유리가 깨끗이 닦여있질 않아 바다를 멀끔하게 보려면 테라스로 나가야 했지만, 방이 건조해서 테라스 문을 반쯤 열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욕조는 없지만 화장실도 깔끔하고 큰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는(빨래를 할 일은 없지만) 레지던스 식 호텔이다. 1층에 편의점이 붙어 있어 캔맥주 네 캔과 치즈, 샐러드를 샀다. 저녁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예정이기 때문에 간단한 안주 거리만 사들고 다시 숙소로 올라왔다. 흑맥주 한 캔을 딴 뒤 벌컥벌컥 마시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을 펼쳤다.    하루키의 책은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 모두를 좋아하는 편이다. 쉽게 읽히지만 메시지는 가볍지 않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작가처럼 글을 쓸 수 있는 그의 센서티브 한 감각을 좋아한다. 특히나 그가 음식이나 술, 혹은 잠자리를 묘사할 때면 왠지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책을 반쯤 읽고 나니 맥주도 두 캔이나 마신 상태였다. 슬슬 배가 출출해져 선물 받은 와인과 함께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이겠지만 어차피 숙소에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틀어놓고 저녁과 와인을 마셨다. 우디 앨런이 성추행 논란에 휩싸여 한 동안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났지만 할리우드라는 곳의 소식은 언제 어찌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그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영화를 계속 좋아할 것이다.  

  한 시간 반 동안 1920년대의 파리 속으로 들어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만난 뒤 현실로 돌아왔다. 마저 쓰지 못한 인터뷰 답변을 작성한 뒤 메일로 보내고, 쓰고 있던 소설의 캐릭터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집에서는 한 줄도 써지지 않던 글이 낯선 곳에 오면 줄줄이 나올 때가 있다. 낯선 공간과 풍경이 주는 어색한 기운이 평소의 내가 아닌, 아주 조금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 든달까.  

  그런 이유로 여행지에서 글을 쓴 적이 많다. 새로운 상황이 주는 영감으로 새로운 장면을 적어나갈 수 있었다. 이제는 가까운 해외도 가기 어려워진 데다 바이러스로 사람이 붐비는 국내 여행지도 꺼리게 돼 결국은 혼자 호텔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이 최선이다. 바쁘게 타이핑을 해가며 글을 쓰고 나서 한 숨 돌리는데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중력에 따라 이렇게 글쓰기가 효율적일 수 있나 싶어 노트북을 덮고 맥주를 한 캔 더 꺼냈다.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 배의 뱃고동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렸다. 

  혼자 온 여행에서 마시는 술은 지나치지 않아서 좋다. 나만의 템포로 원하는 만큼을 마시다 알딸딸해질 즈음이면 포삭거리는 이불속에서 스르르 잠에 들곤 한다. 앞이 바다니 커튼을 모두 걷고 헐벗은 채로 편하게 잔다. 집에서는 잘 때 땀이 나면 이불과 시트를 자주 빨아야 하기 때문에 주로 잠옷을 입고 자지만, 여행지에 오면 세탁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12월의 첫날 아침 해를 맞이한 건 오전 7시 정도다. 텀블러에 받아 놓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테라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의 굴곡으로 얕은 물이 출렁였다. 바람은 어제보다 차고 커다란 여객선은 육지에서 온 차 몇 대를 싣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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