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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Dec 13. 2020

보스턴

  첫눈이 왔다. 눈은 아침엔 제법 내리더니 오후엔 우박처럼 변해 옷에 닿자마자 녹았다. 나는 옥상에 나가 눈이 녹기 전에 발자국을 내고 들어왔다. 첫눈을 밟는 감촉을 기억하고 싶었다. 비로소 겨울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에 관한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2년 전 보스턴에서의 폭설은 나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다.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는 여행이었는데,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날 폭설이 내려 모든 교통편이 운행을 중지했다. 터미널은 안전요원 빼고는 모두 출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터미널에서 나와 차이나타운에서 식사를 해결한 뒤, 에어비엔비로 숙소를 잡았다. 다행히 우버가 있어서 숙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지만, 우버 드라이버를 만나기 위해 걷는 길 내내 커다란 여행가방을 질질 끌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하고, 당시 여자친구에게서 빌려 온 여행가방이 고장나진 않을까 바퀴에 낀 얼음을 계속 빼냈다. 

  한국에 돌아와 여행가방을 돌려주면서 그녀와 이별하게 됐는데, 가방 안에는 여행지에서 산 선물과 에곤 쉴레의 그림집이 들어있었지만 그녀가 그걸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여행 후 이별의 아픔에 젖어 한참을 힘들어 했고, 다시는 여행가방을 빌리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많은 눈은 스위스 베른에 갔을 때 융프라우에서 보고 처음이었다. 그 광경이 신기해 형과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눈 속에 점프해 묻혀보기도 했다. 눈 위를 수영하듯 헤엄치며 깔깔 웃던 나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았고, 언제 또 이런 눈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마음껏 눈밭을 뒹굴었다. 

  거의 모든 상가가 닫았지만 피자집 한 곳과 멕시코 음식점, 마트 하나가 열려 있었다. 저녁엔 피자를 사서 숙소에서 먹기로 하고 멕시코 음식점에서 맥주와 함께 타코를 먹었다. 뉴욕으로 돌아가지 못해 계획했던 남은 일정을 모두 변경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하는 것 또한 여행에서 흔히 겪는 일이기에 마냥 즐거웠다(여행비를 지불한 형 입장에선 숙박비를 배로 냈으니 조금은 속이 쓰렸을지도 모른다). 


  보스턴이 더 커다란 추억이 된 건, 내가 보스턴보다 뉴욕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 했던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형 때문에 보스턴을 여행 코스에 넣게 되었던 지라, 나는 보스턴 여정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뉴욕에 가고 싶은 미술관과 걷고 싶은 거리가 가득한데 하버드의 도시 보스턴에서 모범생처럼 존 하버드 동상의 발이나 만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싫은 티를 내던 나는 결국 퀸시 마켓에서 먹은 보스턴 차우더에 반하고 왈라스 재즈 클럽에서 본 밴드의 공연에 열광해버렸다. 눈이 오지 않은 날 찰스 강변을 따라 1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며 흘렸던 땀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개운한 배출이었다. 게다가 태어나 가장 많은 눈을 보게 됐으니 잊지 못할 여행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역시 어떤 여행지든 직접 가보기 전엔 모를 일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보스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고, 눈을 보면 계속해서 보스턴이 떠오른다.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마셨던 따뜻한 커피의 진한 맛이 생각나고, 집 열쇠를 구멍에 제대로 꽂지 못하던 꽁꽁 언 손의 떨림이 남아있다. 여덟 명 남짓 되는 손님 앞에서 혼신의 연주를 하던 재즈 뮤지션들의 열기가 피어오른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순간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눈이 그친 밤, 폭설로 갇혔던 보스턴 속에서 시간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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