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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25. 2020

라오스에서 #1

라오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1 라오스 여행 내내 행복하기만 했는데, 치아교정기 철사가 빠져서 계속 입 안을 찌르는 게 신경 쓰여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철사가 워낙 튼튼해서 잘리지도 않고 라오스 치과라도 찾아서 가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그냥 다이빙이나 하러 가고 싶다.
#2 삐져나온 철사가 거슬려 온종일 사투를 벌인 끝에 자력으로 교정기를 뜯어버렸다. 의사 선생님에겐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단 일 초도 빠짐없이 내 혀를 찌르고 있을 철사를 생각하면 철사가 아니라 내 이를 모두 뽑아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과 스트레스였기에 후회는 없다.
#3 사투 끝에 뜯어낸 철사는 온갖 방향으로 뒤틀리고 휘어져 있었고, 나는 비로소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 날카로운 철사를 바라보다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어딘가 한 군데가 계속해서 아파본 사람은 이런 서글픔을 알아줄까, 이 얇디얇은 철사의 휘어진 몇 미리 때문에 나는 몇 시간을 거울 앞에 서서 크게 입을 벌리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그와 싸움을 했고, 뽑아낸 철사를 한참 바라보다, 혹 나는 이 철사와도 같이 모나고 날카로운 어느 부분 때문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건 아닌가 하는 때 아닌 생각이 들었다.
#4 갑자기 저런 생각이 든 연유에 대해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이번 여행에선 서로에 대한 진중한 대화가 많이 오갔는데, 상대방을 공격하듯이 말하는 내 특유의 말투가 상대방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소 같으면 이런 얘기를 들을 때에도 "상관없어, 내가 편한 대로 하고 살 거야."라는 식이 었을 텐데,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아무리 나라도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나는 원래부터 공격적인 성향을 갖고 있진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생활기록부만 봐도 '내성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함'이라는 말이 적혀있을 정도의 조용한 아이였는데,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3학년 때는 '리더십이 있어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단체 활동을 주도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라는 식의 생활기록부를 받고 4학년으로 올라갔으며 그 이후로도 그런 성격이 유지돼 왔다.
#6 잘난 체하는 것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얄밉고 재수 없는 부분도 하나의 매력인 게 아닌가 싶다) 여러모로 학창 시절부터 인기가 많던 스타일이라 주변에 친구가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를 뽑자면, 나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해도 돼"나 "뭘 해도 상관없어" 같은 대답보다는 "난 이거 할래" 나 "난 안 하고 싶어" 같이 분명한 선택을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곤란한 상황에서 선택하기 어려워했던 친구들은, 확실하게 선택하고 거절하는 내 성격을 좋아해 준 게 아닌가 싶다(제발 친구들이 그 부분만 빼고 날 좋아한다거나 혹은 널 좋아한 적이 없다고 댓글을 달지 않았으면 한다).
#7 예전에 누가 말하길 좋은 성격이 언젠가 도를 넘어 독이 된다고 했던가, 나는 좋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 앞에서나 토의하는 자리에서도 굳이 날을 세워가며 빠닥빠닥(빠닥빠닥이란 말을 나만 쓰는 건가 의문이 든다) 나의 의견을 얘기했다. 일정 부분에서는 '사이다'같은 존재가 되기도 했지만, 무리해서 의견을 앞세워 그 자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그룹의 분위기를 흐릴 때도 더러 있었다.
#8 원래의 의도는 누습이나 부정 등에 맞서기 위해 이런 나의 성격을 고수하고자 하였는데, 의도와 달리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이에게 방향이 향할 때가 있는 것이다. '할 말은 하고 살자'라는 게 '안 해도 될 말'까지 하게 된 꼴이랄까.
#9 성격이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많이 바꿀 생각까진 딱히 없지만) 이 날카로운 철사를 뽑아내고 한 결 마음이 편해진 나를 보니, 조금은 둥글게 살아가 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그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고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나의 적들이 조금은 날 덜 미워하지 않을까(여전히 밉다 하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앞으론 조금 더 겸손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며 살아갈 테니 예쁘게 봐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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