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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24. 2020

걷는 듯 천천히

천천히 가도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면

나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편하게 써 내려가는 편인데, 연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건 여전히 어렵고, 이야기하고 나서도 마음이 무겁다.


아무래도 연기라는 일의 깊이가 인간의 생애와 비슷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이제 갓 서른이 된 나로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를 읽다 보니 내가 연기를 할 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보게 됐다(정확히 말하면 연기는 이러하다, 라기보다는 책을 읽다 느낀 점을 쓴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에세이에서 본인이 영화를 만들 때면 '내가 일상생활에서 건져 올린 기억과, 눈앞에서 배우들이 전개하는 생활에 대한 관찰을 중시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영화 속 명장면을 떠올리면 주인공이 오열을 하며 분노하거나, 인물이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 희로애락을 분출해 거대한 에너지로 관객을 덮칠 때를 떠올리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을 찾기가(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갈등이 심화돼 두 인물이 다투는 장면보다는, 상처를 입은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이라던가, 자매들이 한 창에 모여 밖을 구경하는 장면 등이 기억에 남곤 한다.


아마도 큰 사건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에 끼어 지속적으로 덜그럭거리는 인물 간의 갈등이 어느 부분에서 슬며시 풀어지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때 보여지는 장면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 혹은 불편함 등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입장에서는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나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파격적이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를 연기하는 것보다 (물론 이런 부분도 매우 어렵지만) 서정적이고 잔잔한 기류가 흐르는 일본풍의 영화를 봤을 때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 캐릭터를 한 번에 표현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나 극에 치닫는 표현이 적기 때문이다.


고로 그런 캐릭터를 맡게 됐을 땐 그의 성격이나 성향 등을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부분에서 찾아내 관객들이 알게 모르게 '은밀히' 연기해 그의 삶이 묻어나게 표현해야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도 상대방이 내 앞에서 분노에 가득 차 주변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을 하는 경우는 지극히 적기 때문에, 대화를 하면서 상대가 구사하는 문장의 형식이나 주로 쓰는 단어와 표현, 습관적인 움직임이나 내가 하는 말에 반응하는 태도 등으로 성격이나 성향을 파악하게 되는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일분 가량 고민 끝에 대답한다면 꽤나 신중한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다는 게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연기를 배우면서 '목표'를 정확히 해야 한다는 말을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어떤 수업에서 극작가 안톤 체홉이 표현하는 인물들은 목표는 뚜렷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려갈 의지가 부족한 인물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목표는 뚜렷하지만 달려갈 의지가 부족한 인물들이라니, 목표가 뚜렷하면 말이나 행동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 마련인데, 어떤 인물들은 수많은 방해물과 스스로의 두려움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삶도 그러한 것이, 다이어트만 해도 끊임없이 나를 경계해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을 계획하지만 눈 앞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치킨 한 마리만 가져다 놔도 목표의식이 흔들리기 마련 아닌가.


예가 별로 고급스럽지가 않아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무쪼록 우리의 일상이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우리네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굵직한 에피소드나 터닝 포인트 같이 일종의 충격적인 사건들을 기억하곤 하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일상은 어떠한지, 나의 생활에서 찾아낼 수 있는 특징들은 무엇인지 조금은 더 살필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은 밤.

-201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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