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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26. 2020

라오스에서 #2

라오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1 


하루키는 달리기 마니아다.


역사가 깊은 보스턴 마라톤도 여섯 번이나 출전했고, 그리스, 하와이 등 여러 곳에서 총 스물다섯 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러너다.


케임브리지에 살 때는 매일 찰스 강변을 달렸으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까지 낸 소설가이자 러너. -


하루키는 여행을 다니거나 타지에서 살아가게 될 때에도 빠짐없이 조깅을 하는데,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달리기 이야기에 나도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시절 육상부에서 중장거리 선수(1500m 전문이었다)로 활동하면서 매일 아침 6시부터 운동장을 스무 바퀴씩 돌고 수업을 마치면 남아서 또 스무 바퀴를 뛰어야 했다(이 외에도 근력 운동 등 여러 가지로 운동량이 많아 꽤나 힘들었다).


그 시절 단거리를 뛰는 친구들은 운동회 때 100m, 200m 같은 흥미진진한 경기에서 일등을 하면 친구들에게 환호성도 받고 인기가 많았는데, 앞 주자들이 꼴찌로 달리고 있던 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그들이 단번에 앞의 주자를 모두 추월해 제일 먼저 결승선을 밟으면 스탠드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결승선으로 달려 나와 마지막 주자에게 헹가레를 해주곤 했다.


하지만 유독 단거리에는 소질이 없어 강제적으로 장거리 선수가 된 나는, 운동회 종목에도 있지 않아 마음에 드는 여자애 앞에선 달리기 실력을 뽐내지도 못 할뿐더러 선수보다 관객이 더 적은 청소년 육상 대회에서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데, 운동장으로만 해도 일곱 바퀴 반을 달려야 하는 지루한 종목이었기에 코치님조차 저 멀리서 하품을 하며 나를 지켜보다가 세 바퀴가 넘어가면(대회는 레일 한 바퀴가 400m로 되어있다) 그제야 레일 근처로 뛰어와 '스퍼트! 스퍼트!'라고 외치는 소리에 나는 남아있는 힘을 짜내 결승선에 도착해야 했다.



언젠가 한 번 '러너스 하이(달리기를 하다가 가장 힘든 순간이 지나가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에 대해 잠시 거론한 적이 있는데, 그 순간이 오기 전의 고통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내 몸을 조여 오는 기분이다.


어찌 됐든 나는 출전했던 대회의 주자 삼십여 명 중에서 칠 등으로 들어오는 저조한 성적으로 결국 메달을 따지 못 해 그 날로 육상을 그만두었는데, 메달 하나 따 보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축구나 농구를 할 때면 아직 남아있는 달리기 실력이 나름대로 도움되는 것 같기도 해서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기를 하는데 배울 게 뭐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도 전문가 수준은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 달릴 때 자세에 따라 보폭이 달라지기도 하고 호흡법이나 주어진 거리에 따라 체력을 적당히 배분하는 방법과 마지막에 폭발적인 힘을 내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방법 등을 배운다.


아무튼 다시 하루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렇게 타국이나 타지에서 달리기를 하는 하루키의 모습이 부러워 나도 언젠가 한 번은 해외여행 중에 달리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여행 중인 날마다 과음을 하는 바람에 매일 늦게 일어나버려 일행들과의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빠듯했기 때문에 항상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던 나를 한심하게 생각해 자책하던 중, 이번에 라오스로 여행을 가게 돼 이번엔 꼭 아침 달리기에 성공하리라는 마음으로 배낭에 조깅화와 운동복을 같이 넣었다.


하지만 도착한 라오스는 지역과 지역 사이의 이동시간이 꽤나 길어 이동하면 저녁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놀기 바빴고,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방비엥은 축제 분위기라 매일같이 술을 진탕 마시는 바람에 전과 다름없이 늦잠을 자 배낭 속의 조깅화는 좀처럼 나올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라오스 일정 중에 세 번째 여행지인 루앙프라방에 도착했는데 이곳이야말로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라오스의 유럽이라고 불리는 루앙프라방은 서양인들이 많아 유럽식의 건물이나 레스토랑도 많고, 매일 아침 여섯 시마다 탁발식이 있을 정도로 종교적 의식이 강한 곳이라 동네가 조용하고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2 루앙프라방의 건물들은 오묘하게 동서양이 조합되어 일층은 유럽 특유의 원색이나 베이지 톤의 색이 강한 인상을 주고 이층은 목조식 건물에 지붕은 일본의 갓쇼즈쿠리 양식이나 한옥 기와지붕 양식과 비슷한 식이었다.



이토록 멋진 건물들이 즐비한 동네가 달리기를 하기에 적당한 것 같아 여행 한 지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배낭 깊은 곳에 구겨져있던 조깅화를 꺼내 신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탁발식이 끝나고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서서히 달리는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 곳에 교통신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에서 달리기를 할 때면 한강 같은 곳 말고는 길의 신호나 많은 차 때문에 자주 멈춰야 해서 조깅을 하러 나가려다가도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많지 않아 지나가던 개가 나를 반기며 앞으로 달려올 때 정도에나 멈춰 서게 되는 것이다.


중심가를 지나 사원들을 슬쩍 들어갔다가 나와 메콩강을 바라보며 한참을 돈 뒤 아침 시장을 적당히 구경하고 숙소 앞의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한 건 정말이지 매우 오랜만이었는데 상쾌한 기분에 시원한 커피를 한 잔 마시니 괜스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기분이 드는 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침에 한강이라도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분 좋게 달리기를 하기 좋은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달리기를 말할 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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