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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Jan 15. 2022

고쳐 쓰기

캔들워머가 고장 났다. 전구 탓인가 싶어 할로겐전구 세 개를 한꺼번에 주문했지만 전구 탓이 아니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고쳐보려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보니 만 오천 원 남짓 하는 제품.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새로 사기로 마음먹었다. 


만 오천 원짜리 워머를 고치기 위해 애쓴 시간과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이 맞겠지만 원체 뭐든 바로바로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단 돈 만 오천 원이라지만 무엇을 사든 제일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르기 위해 고민한 시간이 있고, 지금은 쓰지 않아도 지녔을 때의 기쁨을 간직하며 집 안에 비치해두는 물건도 있다. 


 그때그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사물에 대한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원했던 것과 다르면 알맞은 제품을 새로 사는 것이 효율적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면 내 삶에 이 물건이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편이다. 꼭 그 물건의 용도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알맞게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캔들 워머가 워머의 기능을 하지 못해도 아끼는 인형이나 주짓수 시합에서 받은 금메달을 걸어놓는데 쓰여도 그럴듯하지 않을까 하며 그 물건의 쓰임새를 고민해보는 것이다. 


 다르게 쓰기를 버릇처럼 말하게 된 것은 연기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잘할 수 있는 캐릭터를 어필하다가 어떤 감독이 "그런 거 말고 이런 거 하면 잘할 것 같은데"라고 해서 새로운 캐릭터를 맡은 적이 있고, 처음엔 다소 어색했지만 차차 적응해가며 한 번도 안 해본 캐릭터에 대한 도전이 나름 성공적이라고 느껴졌던 적이 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쓰임새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기분이란 마치 나의 우주가 넓어진 기분이랄까. 


  비단 연기뿐만 아니라 이 정도면 됐지, 하며 글쓰기를 마무리해놓고 기한이 다가와 다시 펼쳐 본 원고가 엉망이라고 느껴져 고치고 또 고친 적이 있다. 글이야말로 오래도록 써 온 것을 싹 다 지우고 새로 쓸 순 없는 노릇이니 고치는 수밖에 없다. 어디서 돈 주고 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애착이 생긴다. 그 전과 비교를 하며 무엇이 나아졌는지 흐뭇해하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아쉬워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마음이 함께 붙는다. 어찌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고쳐쓰기 또한 나에게 버릇이 되었다. 


  사물이야 그렇다 쳐도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말하지 않나.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하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고치거나 고장 난 채로 곁에 둬야 하는 존재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 모든 관계를 질리거나 필요 없다고 버리고 새로 취하려 한다면 그 사람에게 관계란 무엇이 될까. 못나든 아프든 부모는 자식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아픈 손가락이라고 하면서도 그 손가락을 꽁꽁 싸매고 십 년, 이십 년 키운다. 그러니 다른 관계에서 가족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기가 어렵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고쳐 쓰고 다르게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쉽게 갈아치우다 보면 필요하고 효율 높은 것만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이란 이따금씩 무용하고 하잘것없는 것에서 그 깊이를 느끼기도 하는 것 아니겠나. 이야기를 갖게 된 사물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에피소드를 지닌 오브제가 되어 내 삶과 함께 성장한다. 사건, 사고가 많았던 관계가 한 번 승화하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평생 옛 추억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니 오늘도 고쳐 쓰자고 생각한다. 새로운 쓰임새를 찾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워머는 도저히 못 고치겠다. 메달을 걸어봐도 폼이 나지 않는다. 새로 사서 추억을 쌓겠다. 새것은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좋은 발판이 되지 않나. 역시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다. 온고지신의 자세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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