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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14. 2022

가능한 판타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의 취향이 하루키의 취향과 흡사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재즈, 클래식, 위스키, 맥주, 음식 등 개인의 취향이 캐릭터에 맞게 적절히 투영되어 있다. 그런 캐릭터들은 대개 특별한 능력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달라지는 점이라면 그들에게 특수한 상황이 생겨 특별해진달까. 


  하루키의 취향은 그의 에세이에서도 자주 드러나는데, 그는 세계적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평범한 사람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여느 나라의 부지런한 사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점심이 되면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책을 읽는다. 손수 밥을 지어먹고 밤이 되면 일찍 잠에 든다. 그는 실제로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기에 그의 삶에서 특별히 대단한 판타지를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루키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거나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취향에 흥미를 느낀다. 약간은 섹시해진 상황에서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이라던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로 몰고 싶어 하지 않는 자동차를 매끈하게 표현한다던가,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남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두 남녀의 달큼하면서도 쿨한 대화 등이 제법 근사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네다섯 시간 글을 쓰고, 매일 오후 빠짐없이 운동을 하는 일, 직접 식사를 차려 먹는 일 등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평일 내내 출근하고 주말엔 내내 뻗어서 잠을 자거나 밀린 약속을 나가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꿈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이틀쯤은 해볼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하루키는 본인의 업적은 낮은 서랍 속 깊은 곳에 두고 스스로 지켜온 꾸준한 노력과 루틴만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글로써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누구에게 강요하지도 않으며 오래도록 쌓아 온 개인의 확고한 취향으로 타인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재주가 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그의 문체 안에 일상적인 취향들을 녹아내며 그것이 마치 가까이에 있는 로망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을 지녔달까.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그의 생활을 따라 하지 못할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처럼 느껴지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일과, 확고한 취향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험이 그를 거쳐갔을지 가늠해보면 흉내 내기 힘든 일이 하루키가 가진 특징이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그를 따라 글 속에 나오는 음식을 해 먹어 보거나 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클래식을 들으며 유식한 체해봤지만 모두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고작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라디오헤드의 <kid a>를 언급했을 때 '나도 라디오헤드는 듣지!!!' 하고 반가워하거나, 몇 키로 조깅을 한 뒤 사무엘 아담스를 벌컬벌컥 마시는 일 정도다. 

  

  그래도 하루키의 글을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취향과 일상에 대한 로망이 생기는 건 멈출 수 없다. 지금이야 '나도 부자가 되어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하루키와 같은 생활을 해볼 테야'라고 허풍을 떨어보지만 아마 여유가 생기면 밤새 술을 퍼마시다 다음 날 점심쯤에 깨 쌀국수를 시켜 먹은 뒤 낮잠을 자고 있지 않을까. 


  이건 다른 얘기지만 예능 프로그램 <삼시 세 끼>를 연출한 나영석 피디는 한 강연에서 <삼시 세 끼>가 성공한 이유로 시청자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환상'을 준다고 했다. 시골에서 세 끼 음식을 챙겨 먹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나 스타가 아니어도 하루 정도만 시간을 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거기서 식사를 챙겨 먹고 자고 노는 것이 전부다. 


  어쩌면 우리는 실현 가능한 환상을 저 멀리 판타지로 두고 스스로를 불행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어찌하는 게 급선무지만 하늘을 날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못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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